❖ 로마서 서른세 번째 강론
로마서 6:12-14
은혜 아래 있음
대체적으로 많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고 목회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협박하는 듯한 설교로 사람들의 행위를 독려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부추긴다.
예컨대 오늘날 주일성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만 주일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십일조라는 율법을 내세워 그것을 행하면 물질의 복을 주시지만 십일조를 떼어먹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질의 손해가 나도록 보응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짓된 세상의 말을 진리인양 뇌까린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결과를 보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은혜라는 말은 수없이 내뱉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은혜는 1도 모른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것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자는 새 생명으로 행하는 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라고 하였다. 단순히 주와 더불어 죽고 살아난 시간이나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생명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라는 결론을 가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과 부활이 날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자가 성도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향해 명령법으로 표현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처럼 보이는데 풀어서 말하자면 ‘너희 죽을 몸으로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몸의 욕망에 순종하는 결과를 낳는다’라는 뜻이다. “몸”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두 가지 다른 단어로 쓸 수 있는데 하나는 ‘육체’라는 의미의 ‘살크스’이고 또 하나는 ‘그릇으로 사용되는 몸’이라는 의미의 ‘소마’인데 여기서 ‘소마’로 쓰고 있다는 것은 죽음을 담고 있을 수도 있고 생명을 담고 있을 수도 있는 몸이다. 즉 죄가 지배하는 몸은 죽음을 담고 있는 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왕노릇하고 있는 그 몸은 죽을 몸이라는 말이다.
또한 “사욕”이란 헬라어로 ‘에피뒤미아’인데 ‘욕망’, ‘욕심’, ‘탐심’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인간이 욕구하고 갈망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말로 바울 사도는 몸이 죄에 굴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갈망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에서 이렇게 보여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미 여자는 선악의 지식 나무를 탐심으로 보았기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생명 나무와 대조해서 표현된 말이다. 그렇다면 선악의 지식 나무를 탐스럽게 보았다는 것이 생명과 상관이 없는 상태이고 그것이 바로 죄라는 뜻이다. 생명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자 하는 그것이 탐심이다. 그래서 이 말을 마태복음 5:28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음욕”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이 단어가 바로 ‘에피뒤미아’이다. 음욕으로 인한 간음은 성경에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표현한다. 즉 인간의 욕심, 탐심이란 그것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러나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하였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그리고 13절에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하였다. 지체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고 의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의의 무기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의 몸에 지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면 몸의 탐심에 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함께 죽었고 또한 살아났다면 이미 주님의 몸인 교회로서 그것 자체가 이미 의의 무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고전 6:14-16)
12절 말씀이 ‘우리의 죽을 몸으로 죄가 왕노릇하게 못하게 하라!’라는 말이 명령법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본문은 직설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령법이란 상대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식의 어법이고 직설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대부분 성경의 명령법을 이해할 때에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명령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으려면 그 명령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이란 한 마디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실행된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말씀이 한다는 의미이고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 내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 중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일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 하시지 않는 분이신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을 못하시는 분인가? 이러한 주장 역시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구원의 결정과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고백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자신의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 언약대로 하시는 분이다.
본문에서 “드리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리스테미’라는 단어인데 이는 ‘함께’, ‘가까이’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붙잡다’, ‘고정하다’, ‘굳게 세우다’라는 뜻의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즉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 가까이 고정한다’, ‘하나님 곁에 굳게 세운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를 바울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 사도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신부로 굳게 세우는 일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 곁에 자신을 굳게 세우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이 바울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바울의 힘으로도 우리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4절)라고 밝히고 있다. 즉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되는 일이다. 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인 교회는 죄가 주장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에 죽을 몸이 왕노릇하여 몸의 탐심에 순종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하는 노력이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몸인 교회는 죄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려지는 상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죽을 몸으로 탐심에 사로잡혀 우상숭배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내가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느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안에서 죽이시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게 하시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그것이 전혀 자격없는 자에게 공짜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이란 내가 부인되어지고 십자가에 죽는 사건이 내 속에 날마다 일어나는 현상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200209 강론/김영대).✞
롬33.06012-14 은혜 아래 있음(202002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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