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32강 로마서 6:1-11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불편한 진리 2020. 1. 19. 22:59

❖ 로마서 서른두 번째 강론


로마서 6:1-11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은혜로 베풀어진 것이 복음이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하나님의 의에 합류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떼어 놓은 당상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어치피 영생이라는 문제가 내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다고 오해한다. 율법적인 우리의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면 굳이 내가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을 지식적으로 받아 들이고 그 지식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구약 시대나 바울의 때나 오늘날이나 변함없이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오해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자기 선악의 기준에 의해 판단하고 자기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에 의한 것이고 그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선포하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절)라고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것이었다. 이 표현은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으며 못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를 행하며 소위 말하는 막 살자는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분과 더불어 죄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더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로써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말한 것은 성도의 구원이 단순히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된 교회’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세례”를 언급하여 십자가 죽음에 의해 새롭게 생성된 존재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라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죽은 자가 성도요 주님의 몸인 교회라고 선언하면서 단순히 죽음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것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은 성도의 죽음, 부활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한 묶음이듯이 성도의 죽음과 부활 역시 한 묶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강론의 편의상 한꺼번에 다 강론할 수 없는 상황이라 부득이 나누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5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라고 하였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로 표현하면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모세 언약 안에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발생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회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부활에도 같은 모양으로 하나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합하여 함께 죽은 것이라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함께 다시 살아난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의 재생 혹은 소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성경에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라고 번역하여 시제가 애매모호하지만 새번역성경이나 가톨릭성경에서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 그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절)라고 하여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오래 전에 있었고 그 효과로 말미암아 성도의 부활이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이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로운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된 교회란 미래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다시 살아나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동참되어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묵시 속에 새롭게 살아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4절에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직역하면 ‘새 생명 가운데서 걸어 다니게 한다’는 말이다. 진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 20장에 보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다. 율법에 의하면(신 25:5-6) 장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형제가 형수와 결혼하여 상속자를 잇는데 만약 일곱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부활 때에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7-38)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 이삭에게 주셨던 것, 야곱에게 주셨던 것이 따로 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죽은 자와 맺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와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언약이 모세 때에도 여전히 유효한 언약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으로 나타내셨는데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하셨던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하나님은 존재 자체시라는 뜻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의 부활에 대한 지식은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시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5)라고 한 마르다의 수준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자들이 부활을 사건으로만 이해하여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한국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해마다 부활절을 지키면서 자신도 언젠가 소생내지는 환생 할 것이라는 소망을 부활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시는 일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재생이나 소생, 환생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상태이며 존재 자체이다. 상태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다는 상태를 말하며, 존재라함은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되어 함께 죽은 자가 되고 또한 함께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음부의 권세가 깨뜨려졌고 이 땅에 새로운 부활의 세계, 부활의 나라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산 자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교회, 성도를 다스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8-11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계산된 부활,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빌 2:8-9). 이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생명의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여길지어다”(헬, 로기조마이)라는 말은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이다. 신부된 교회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비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0-32)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4-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생명이 된 이 관계를 결코 사람이 나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약함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성도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 안에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살아 있음이다. 요한 사도는 그 살아 있는 상태를 이렇게 나타내었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4-6)


(http://cafe.daum.net/joosung 20200119 강론/김영대).✞



롬32.0601-11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202001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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