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서른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7:7-12
율법이 죄냐
인간이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그럴 때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이다. 즉 자기 자신의 유익과 손해에 관계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사회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산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서로에 대한 규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윤리이며 도덕이며 좀더 실제적인 면에서 법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사실 모든 인간은 서로간의 규범이 필요하고 법이 있어야만 죄를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어차피 법을 만들어 스스로를 통제하고 죄를 억제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굳이 율법을 주셔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의 죄와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윤리와 도덕 또한 법으로 통제될 수 있는 죄라면 윤리와 도덕의 의식을 강조하여 수준을 높이고 법을 더욱 강화하면 되는 문제이다. 세상에서의 죄란 행동으로 나온 결과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단순히 행동으로 나온 것으로만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는 마음이 이미 죄악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다 죄일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단순히 율법을 가지고 죄인들을 통제하시거나 아니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찾아 나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라는 힘에 붙잡혀 있고 그 권세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것이 7:1-6의 본문을 통해 결혼에 대한 비유로 설명하였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되지만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아내로 맺은 법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된다. 율법에 의하면 여자와 남편과의 법적인 관계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죽은 남편에게 매이게 될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을 비유로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셔서 율법 안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드시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주님의 몸인 교회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그 다음에는 이제 우리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 열매는 당연히 영생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율법 안에서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니 그러면 애초에 율법이 잘못된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라고 율법의 기능에 대해 밝히고 있다. 만약 율법이 죄라면 율법 자체가 죽음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가 죄를 죄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있으므로 탐심의 마음이 행위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기 20:17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웃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떳떳할 수 있는데 탐심에 대한 율법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안다. 결국 마음의 탐심을 율법으로 꺼집어 내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7절에서 말씀드린 그 논리, 즉 탐심을 율법으로 꺼집어 낸다는 것을 거꾸로 창세기의 사건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라고 창세기에서 밝히고 있다.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지 말라는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선언적 율법을 주심으로 금하는 그 영역으로 가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그 죄에 사로 잡히게 된 상태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여기서 “너는 남편을 원하고”라고 할 때에 ‘원한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테슈카’인데 예전 개역한글판에서도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고 하여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로 번역하였다. 새번역성경을 보면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여자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갈망하지만 그 결과로 남편이 여자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단어가 4장에서도 쓰였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 구절 역시 새번역성경을 보면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번역하였다.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죄가 아니라 가인에게는 자신의 제사에 대한 탐심이 먼저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인정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반발 분노가 표출되어 아벨을 죽이는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만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가 가인에게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고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라고 하였다. 율법,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라고 하였는데 한 마디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절).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라는 말은 의역이고 직역을 하면 ‘율법이 없었을 때’ 혹은 ‘율법과 분리되었을 때’라는 말이다. 즉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자신이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와서 죄를 철저히 고발하니까 나는 죽고 죄만 살아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0-11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에서 “되었도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휴리스코’(발견하다)로 쓰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수동태로 쓰고 있다. 즉 ‘발견되었다’라는 뜻이다. 즉 바울은 과거에 율법, 계명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줄 알고 열심을 내었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율법이나 계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이미 아담을 통해서 보여주신 내용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하지 말라고 하시기 전까지 아담은 에덴에서 살아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 율법에 의해 탐심에 이끌려 선악과를 취함으로 죽은 상태가 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모세가 시내 산으로 율법을 받기 전까지는 살아 있었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시내 산에서 내려오자 그 율법에 의해 이스라엘은 죽은 자로 드러났다(출 32-33장).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율법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고 바울 사도는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12절)라고 바울은 율법에 대해 정리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율법은 구별되어 거룩한 것이고 의로운 것이다. 율법이 왜 우리를 죽은 자로 드러내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에 속한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이 결론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3-27)
율법이 왜 거룩하며 의로운 것인가를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율법 안에서 복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율법도 복음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200315 강론/김영대).✞
롬36.0707-12 율법이 죄냐(202003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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