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30강 로마서 5:20-21 율법과 은혜

불편한 진리 2019. 12. 9. 12:15

❖ 로마서 서른 번째 강론


로마서 5:20-21

율법과 은혜


모든 종교에는 경전이 있다. 그래서 그 경전의 내용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종교이다. 세상의 종교가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경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종교의 경전 정도로 생각하여 읽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서가 아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생명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지켜 행하는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전환되어져 성경 말씀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을 윤리나 도덕으로 정해놓고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사람,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자들이기 때문에 선악을 자기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존재라고 하는데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를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인이라는 말은 내가 착한 일을 하느냐 나쁜 일을 하느냐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홀로 의로우신 하나님께 합류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하나되는 길을 한 사람을 통해 완성하실 것을 계획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 나무를 선악의 지식 나무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피조세계를 죄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주시기 위한 약속이었다. 즉 첫 사람 아담으로 하여금 사망을 통과하게 하신 목적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묵시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함께 끌고 들어가서 죽으신 죽음이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노라고 고백하게 만드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15절)은 “의롭다 하심”(16절)에 이르러 “의인”(19절)이 되는 것이고, “생명”(18절)에 이르러 “생명 안에서 왕 노릇”(17절) 하는 것이라고 이미 밝혔다. 이제까지 논의한 모든 내용들을 바울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로 설명하는데 20절에 보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는 결코 두서없이 갑자기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율법을 언급했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대한 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



1:17에서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이를 3:21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 믿음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율법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 율법 이전부터 이미 믿음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의라고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러면 율법이란 필요없는 것인가? 바울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 20절에 와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죄를 조장하고 범죄를 더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짓도록 유도하시는 분이라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는가? 대체적으로 우리는 율법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죄가 죄라는 것을 율법으로 폭로한다는 뜻이다. 로마서 7:7에 보면 율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이 없을 때에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가 안 된다는 말도 아니다. 단지 죄가 죄인줄 몰랐던 것이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보이고 알리신다는 의미이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외부로부터의 강압과 유혹에 넘어가서 행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본래 어떤 권세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죄의 본질을 율법으로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율법에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죄에 대하여 설명하니 인간들은 자기 행위로 죄를 발생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 바울이 이미 말한대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는”(롬 1:23) 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기준을 자기 중심적으로 가진 죄인들의 모습이고 이스라엘의 모습이며 곧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율법이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율법을 통해 보니까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죄가 나의 주인으로 나를 주장하고 있고 나는 죄의 노예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예전에는 성(性)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한 때 성교육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교육으로 성적인 범죄를 제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에 대해 잘 알면 죄를 덜 짓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매매를 단속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더 교묘하고 은밀한 수법으로 바뀔 뿐이다. 이를 소위 풍선효과라고 일컫는다.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교묘하게 피해갈 잔머리를 굴리는 존재이다. 흔히 범죄자들은 전과가 더해질수록 교도소에서 더 완벽한 방법을 배워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은 교도소를 학교라고 하고 전과가 누적되는 것을 별로써 스타라고 자랑한다. 


이렇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늘의 것을 거부하는 죄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한다. 우리 성경에는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는데 ‘더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뜻이다. 15절에서 “넘쳤느니라”(헬, 페리슈어)라고 말의 비교 최상급으로 20절에 와서는 “더욱 넘쳤나니”(헬, 휘페르페리슈오)라고 쓰고 있다. 마태복음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에서 “더 낫지 못하면”(헬, 페리슈오)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의로, 넘치는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율법이 들어온”이라는 말이 그냥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파레이셀코마이’라고 쓰고 있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란히 들어오다’, ‘곁에 들어오다’라는 뜻이다. 즉 율법을 주실 때에 나란히 곁에 들어온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 본문에서 “그러나”라는 반전의 말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하였으니 “은혜”도 나란히 같이 들어왔다. 율법이 들어올 그때 은혜가 같이 들어왔다는 말이 아니라 이는 이미 창세기에서 말씀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창세기에서 본 것이 비로소 확인되는 순간이다. 


아담이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도록 동산 중앙에 두셨다는 것은 잘 보이는 곳에 먹도록 의도하셨다. 그런데 그 나무가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로 있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지 말라는 율법을 통해 생명을 은혜로 주시고자 하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 때에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율법만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함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창세 전 언약 안에 이미 주어진 내용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이제 바울 사도는 더욱 넘친 은혜로 말미암아 어디에 이르게 되는가를 다시 한 번 더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1절)라는 말씀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고 하였는데 사망이 지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성도를 다스리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먼저 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 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만 진정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한다. 이때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아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과 함께 은혜를 베푸신 목적은 영생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계속 다스린다는 것은 이 땅에서 물질적인 어떤 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 삶의 형편이 어떻게 나아지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다. 세상에서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이나 가정의 행복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죄의 능력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우리를 계속 다스리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공짜로 베푸신 것이다. 


내가 죄를 다루고 움직였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의 노예였다. 죄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이 상태에서 누군가 나를 건져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영생의 상태에 두실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이렇게 선포하였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1-24)


(http://cafe.daum.net/joosung 20191208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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