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1강 로마서 1:1-4 하나님의 복음

불편한 진리 2019. 4. 10. 13:52

❖ 로마서 첫 번째 강론


로마서 1:1-4

하나님의 복음



로마서는 많은 성경학자들이나 설교자들에 의해 성경 중의 성경으로 가장 중요한 성경으로 꼽는다. 교회역사 2,000여년 동안 어거스틴을 비롯한 마틴 루터, 쟝 칼뱅 그리고 존 웨슬리와 칼 바르트 등 기독교의 위대한 인물들의 사상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으로 성경이 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핵심인 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바울 서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 서신의 맨 앞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66권 중에서 특별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책은 없다. 성경은 66권의 책이라기보다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함께 나눌 말씀은 로마서인데 본문과 로마서 1장을 단순히 서론 정도로만 생각하지 말라. 서두에 시작하고 있는 것이 이후에 기록된 로마서의 전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미 로마서 자체가 보여 주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주후 56년경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을 고린도 남쪽에 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가 로마교회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참고 롬 16:23, 고전 1:14, 롬 16:1-2).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밝힌다. “종”(둘로스)이란 ‘주인의 운명에 맡겨진 존재’를 의미하며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보내지다’라는 히브리어(샬라흐) 번역에서 나온 것으로(참고 왕상 14:6, 대하 17:7-9) ‘특별한 뜻으로 어떤 사람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를 말한다. 그의 행위는 보낸 사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사람 그 자신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6)라고 말씀하신 것은 크지 못하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존재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는 스스로 깨달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보낸 자의 것을 전하는 것이다. 보낸 자의 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필히 고난이 동반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바울이 이렇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오늘날 우리 역시 바울을 부르신 그 범주 안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로잡힌 자의 글이며, 보내신 분에 의해 보내심을 입은 자의 글이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게 되었다는 것은 주인과 종, 보내신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의 맥락에서 로마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의 처음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타내면서 자신을 “종”으로 “사도”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서는 주인의 의도, 보내신 분의 뜻대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였는데 “택정함”이(압호리조)란 ‘아포’(멀리 떨어져서, ~로부터 멀리)와 ‘호리조’(표시하다, 경계를 짓다, 지정하다, 제한하다)의 합성어로 ‘구분되었다’, ‘분별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마지막 심판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는 것이나(마 25:32), 바다의 그물 비유에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는 것(마 13:49)에서 보듯이 없음과 있음의 구분이며 생명과 죽음의 구분이요 언약과 비언약의 구분을 뜻한다. 즉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 3:5)이었던 바울을 하나님께서 복음 안으로 구분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준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인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라고 하였다.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복된 소리’ 또는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다. 복된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약속대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복된 소식이다.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말씀되어진 것들을 약속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의 사람들을 통해 나타내 주셨다.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언약을 주셨지만 그 언약의 핵심은 하나인데 곧 메시아(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다는 것이었다. 그 언약의 성취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4절)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단순히 역사적 성인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보여 주시고 말씀하셨던 모든 제사 제도들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을 담아 보여 주는 그릇들이었을 뿐이다. 대제사장, 성전, 제물, 안식일을 비롯한 안식년과 희년, 절기들, 십일조 이 모든 것들은 언약의 인물을 보여 주는 도구들이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시는 언약의 의미를 분명히 알았다면 그 속에서 오실 메시아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율법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고 그리스도라는 실체는 아니었기에 구약의 어떤 인물도 예수 그리스도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씀하나? 본래 인간은 전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아니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함으로 인간은 죄인이 되어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이 된 상태가 되었다. 단순히 단절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친다면 하나님을 죽이려고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원수가 되었다. 그것이 죄인된 인간의 실체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찾는다든지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생명을 나타내시고 드러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그 후손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때가 되매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다. 출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각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과 언약을 맺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창 6:18, 17:2, 출 19:5, 레 26:42, 왕상 11:11, 렘 31:32).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다. 오히려 언약을 주시는 상대자로 세운 구약의 인물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실패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홀로 이루셨다. 인간들이 구원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거나 예수님을 초청한 적이 없다. 그러기에 마지막 때에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의해 베풀어진 은혜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인간 편에서 만들어 내거나 죄인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이란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분하여 복음을 주시고 복음 안으로 불러 들이셨지만 결코 바울이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복음이 바울을 소유하고 있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구분되었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우리 모든 자들도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복음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것이다. 우리가 곧 내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결코 나 자신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의 기분에 의해 기쁜 소식이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의 복음이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0-12)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기쁨을 위해 글을 쓰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을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엡 1:5) 결코 우리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약속하시고 때가 되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인간 세계의 집안 식구는 본래 원수라는 것을 복음이 드러내며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를 복음이 갈라놓게 되어 있다(행 28:24-25).


세상을 살 맛이 나지 않고 허무하기 때문에 믿어야 되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세상 살이에 진저리가 나고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의지해야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 삶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찾아야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고 가정의 행복을 이루는 것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문제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자기의 구원을 위한 행위인 반면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죄인된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신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십자가로 나타난 복음 그것을 누가 알겠으며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복음 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쁨만이 그 십자가 안에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진 것이다. 믿어졌다는 것은 내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다. 믿어졌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그만두거나 계속 믿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복음에 사로잡힌 자로 살아갈 뿐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407 강론/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