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의 글/나누는 복음

[스크랩] 사무엘하 11:1-27 헷 사람 우리아(20151011 은석교회 오후강론)

불편한 진리 2015. 10. 22. 12:03

은석교회 오후강론(2015.10.11)

사무엘하 11:1-27

헷 사람 우리아

 

본 장은 참으로 유명한 본문입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치명적인 범죄로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많이 언급하고 많이 이야기된 만큼 또한 오해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들어왔던 설교들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범주 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윗 왕으로 인해 안정되고 강한 나라가 되어 다윗은 이제 왕으로 직접 전쟁에 나갈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다윗이 직접 전쟁이 나갔으나 직접 나가지 않고 부하들만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옥상을 거닐었고 마침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욕정을 참지 못하여 신하를 시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함으로 죄를 짓는 자리에 스스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죄를 지은 근거를 설명하기를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난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녁에 일어났다는 것은 전날 어떤 일로 인해 불규칙적인 생활을 했거나 비정상적인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생활의 균형이 깨어졌고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지면서 범죄에 노출되기 쉽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삶의 리듬을 잘 유지하고 불규칙적인 생활로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과연 맞는 해석일까요?

또한 늦게 일어나서 왕궁 옥상에서 거닐었기 때문에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왕으로서 항상 자기 책임에 충실해야 하는데 왕이 되었다고 이제 타성에 젖어 안일하고 나태해져서 쉽게 죄에 노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항상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니 판단의 기준을 잃어서 헛된 마음에 빠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 한 것입니까?

평상시와 달리 늦게 일어나 집중력이 약해져 있었으므로 이미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에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니 무조건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녀가 누구인지 신하를 시켜 알아보게 함으로 죄를 지을 환경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죄를 지을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런 환경이 되었다면 적극적으로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면 과연 성경적인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저녁에 일어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죄를 덜 짓고, 한가하지 않고 늘 바쁘게 자기 일에 집중하며 항상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은 죄를 덜 짓고, 죄 지을 환경을 만들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죄를 덜 지을까요? 이 모든 생각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해석들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죄를 행동에만 국한 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죄는 행동에 의해 나온 결과만 가지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이전 마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들은 다 죄인으로 이미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죄고 그 마음을 따라 행한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에서 죄가 발생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상을 늘 바쁘게 살면 죄를 지을 일이 없습니까? 환경이 좋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은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환경이었는데 죄를 지었고 다윗 역시 풍부한 환경에 있었지만 범죄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경제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나 환경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마귀의 세력이고 권세입니다. 인간이 거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라는 권세를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죄를 안 지을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살해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행한 이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다윗이 죄를 범할 때 왜 막지 않고 그냥 두셨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단순히 우리의 행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의 범죄가 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일이 일어난 후 충동적으로 다음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사로잡아 이끌어 가고 있고 죄인은 그 죄를 대항하고 거부할 힘이 없기 때문에 끌려가고 떠밀려가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밧세바를 범할 뿐만 아니라 우리아를 살해하는 자리까지 끌려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비참함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기 위하여 범죄하는 다윗을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조장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을 가만히 두니까 스스로 죄를 짓는 상태로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두시니까 다윗은 너무도 당당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권을 이용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아는 사무엘하 23:39에 보면 37명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밧세바는 다윗이 잘 알고 있는 부하의 아내였고 일반적으로 이쯤 되면 범행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도 밧세바를 불러 동침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죄를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이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당하게 왕궁으로 데려오게 하여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 전쟁 중에 우리아를 불러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고 시도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전장의 최전선에 내세워 죽게 하는 이 모든 과정이 전혀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왕권을 이용하여 당당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뿐만 아니라 우리아를 죽이는 이 일을 너무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우리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아에 대하여 말할 때에 헷 사람 우리아로 표현하고(3,6,17,21,24) 밧세바에 대해서는 우리아의 아내’(3,11,26)로 은근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밧세바는 헷 사람의 아내였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헷 사람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5장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언약하실 때에 땅의 경계를 말씀하시면서 헷 족속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그 땅의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5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3:5-6)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다 쫓아내지 못한 헷 족속 중에서 우리아는 다윗 왕국 37인 장수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으로 이스라엘 전쟁의 공을 세운 장수였지만 다윗이 보는 시각은 우리아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방인에 대한 시각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사건에서 잘 드러납니다. 법궤를 손으로 잡아 죽은 웃사의 일로 인하여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는 일을 중단하고 그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둡니다. 이방인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를 두었다는 것은 혹시나 무서운 법궤로 인하여 저주가 내려진다면 이방인이나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단순한 간음죄 살인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모세에게 언약을 주신 것이었고 또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받도록 하신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다윗을 통해 이방인들도 언약의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살해한 사건 속에서 드러난 다윗의 사고방식은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고 다른 사람은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옳고 이방인은 틀리며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받아야 하고 이방인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다윗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후에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서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단순히 요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믿고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야 마땅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를 책망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면서 본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아가 이방인이었기에 죽여도 상관이 없었고 아무 죄 의식 없이 밧세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정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본문을 보면 마치 다윗이 여자를 깨끗하게 하여 동침하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4절의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다윗은 그 여자를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여자는 부정해진 몸을 씻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입니다.

행동의 순서가 여인이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후 다윗이 여인을 취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여인을 취한 후 여인이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다윗은 자신이 왕이요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전혀 죄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왕의 명령에 의해 불려와 동침한 일을 부정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자신은 남의 여인을 취하였을 때 헷 사람 우리아는 집에서 아내와 동침하도록 보내어졌지만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11)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헷 사람 우리아와 그 아내 밧세바로 인하여 다윗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만 다윗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요압에게 우리아를 죽일 계획을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전쟁터에 보냅니다. 헷 사람 우리아는 언약을 안다고 하는 다윗의 손에 이렇게 희생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다윗이 범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왜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의 희생을 통해 다윗의 죄를 드러내고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죄인의 상태 그대로 한시적으로 버려두심으로 어디까지 죄의 세력에 끌려가는가를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언약 안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만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할 때에 왜 족보에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1:6)

 

솔로몬은 결코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아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육신적으로 우리아의 아들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아가 희생된 그 희생을 담고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는 언약을 위해 희생된 그 희생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희생을 집어넣어서 언약을 이어가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언약을 위한 희생을 우리아를 반추하여 다윗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잠시잠간 두고 보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 속에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윗의 언약을 따라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위하여 친히 희생하심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참된 언약의 왕이십니다. 죽은 개 같은 존재가 은혜를 입은 것을 믿는 자가 성도요 언약 백성입니다(강론/김영대)


출처 : 주성교회
글쓴이 : 김영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