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30.민수기 정리

불편한 진리 2015. 2. 15.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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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정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수 노릇하기 때문에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 실패의 연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적인 면이 드러난다는 것이 민수기의 내용이다. 민수기는 처음부터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는 것이다(1:3). 이는 하나님께서 유월절과 홍해 사건 이후 군대로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셨음을 의미한다(12:41). 이 군대의 특징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진하게 되어 있다(2:34).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진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군대가 싸워야 할 대상이 이스라엘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다(31:3).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전쟁하는 여호와의 모습을 자신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에 담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미 애굽이라는 적을 징치하고 나온 마당에서 또 무슨 원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가나안 땅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오래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 때가 아니라 후에 주실 것이었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6). 하나님은 가나안 땅 족속들의 죄가 관영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는 그들을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심판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민수기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진행함에 있어서 군대로 명명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심판자란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싸우는 싸움은 보통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룩한 분이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싸움이기에 항상 정결과 거룩이 선결되지 않으면 군대의 의미가 없다(5:1-8:26).

정결과 거룩을 유지한다는 것은 유월절 정신으로 언약의 말씀(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항상 거하시는 것으로 상징된 성막으로부터 나온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성소의 언약궤에 있는 돌판에 새겨진 말씀이 이스라엘을 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 궤가 떠날 때”(10:35) 혹은 궤가 쉴 때”(10:36)라고 표현하여 언약궤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의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아니하고 성막의 주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형식으로 배치하셨다(1:53).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됨으로 레위인들은 모든 지파의 처음 난 자를 대신한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언약적 의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3:12, 41, 8:18).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토로한다(11:1-3). 그 때 여호와의 불이 진 끝에 떨어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가 이 일로 말미암아 놀라게 된다. 이 때문에 모세가 대신 여호와께 기도한다. 그랬더니 불이 꺼졌다.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70인의 장로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여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이셨다(11:16-25). 이는 후에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된 자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도록 하셔서(27:18) 하나님의 신이 추구하는 인간이란 중보자적 기능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11:29).

드디어 가나안 접경에 도착하여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본 결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13:26-29) 그 땅의 거민들을 볼 때에 도무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모두가 다 거부하였다. 가나안 땅을 거부하면 다른 땅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주시기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땅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정탐꾼을 보내도록 지시하셨는가? 결국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을 못믿고 있는가 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시고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한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그 일하시는 방법이 특이하다는 점이다. 그 특이한 방식이란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데 동행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이스라엘과 상대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하나님의 최종 관심은 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땅이란 약속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만 작용할 뿐이다.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 그들을 통해 약속의 실체가 되시는 분을 이 땅에 보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정결과 거룩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주신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중에 한 온전한 중보자를 세워 그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짓밟아 승리하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여기서 암시되고 있다.

그래서 모세조차도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20:10-12).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책임은 일단 모세에게 맡겨졌고 유일한 중보자로 세우셨다. 이를 통해 오직 한 중보자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 때문에 모세에 대한 어떤 도전이나 반역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론과 미리암의 도전이나(12), 고라 자손의 반역을 철저히 차단하시는 것이다(16). 그래서 언약궤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의 항아리가 들어감으로 반역의 증표가 다 들어가서 증거궤로 불리게 된다. 그 증표와 함께 있어서 인간의 반역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돌판)이 있어나 속죄소로 덮어놓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백성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군대요 또한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히 비언약적 속성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정탐꾼들이 정탐한 일수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다(14:34). 방황하게 하시는 이유는 훈련이 목적이 아니라 비언약적 정신을 드러내고 제거하시는 것에 있다. 그래야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으나 모세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음으로 가나안 공격에서 실패하였다(14:39-45).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는 정신이 아직 충만하게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군대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불뱀 사건을 통해 잘 보여주셨다(21).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놋뱀을 장대에 매단 것을 보는 그것이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만이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미리암의 죽음(20:1)과 아론의 죽음(20:28)으로 시작하여 출애굽 제 1세대는 서서히 죽게 된다. 심지어 모세까지도 가나안 땅에 합당치 않다고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심으로 그 중보자 직분 자체도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서 온전한 중보자를 바라보게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나고 있는데 불순종한 세대에 대하여 하나님은 광야에서 완전히 망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의 발락 왕이 발람의 마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하였지만 발람은 복을 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안목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 중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한 별로 예언된 메시야는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전체에서 보면, 완전히 멸망 상태라기보다는 새로운 세대, 곧 새 이스라엘을 생겨나게 하셔서 그들 선조들의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겪게 하심으로 심판 과정 또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성취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시가 되었다.

그래서 민수기의 두 번째 계수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한 조사이다. 첫 번째 조사에서 계수된 자는 603,550명이었고(1:46) 두 번째 계수된 자는 601,730명이었다(26:51). 두 번째 조사는 첫 번째 조사의 때와 수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광야 생활 중에서 이러한 인구 조사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술 전쟁을 위해서이고(26:2), 또한 중요한 사항은 약속된 땅의 공평한 분배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희생시키더라도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결코 양보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것을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군대로 계수되지 않은 자인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 아닌 자가 하나님의 군대의 못남을 고발하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다(36)(1999.4.25./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