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31.민수기 35:1-34 레위인과 도피성

불편한 진리 2015. 2. 14.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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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5:1-34

레위인과 도피성

 

34장에서 약속의 땅에 대한 경계와 어떻게 분배하실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조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사는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에 대해 말씀하신다. 레위인들이란 하나님의 성전 일을 위하여 땅에 대한 기업이 없는 자로 선택받은 가문이다. 즉 하나님만 지향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 만약에 그들이 뿔뿔이 헤어져서 아무도 레위인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뜻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약속의 땅에서의 삶이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 살 곳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표시이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레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49:7)고 했다. 레위 지파가 기업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것은 이 저주 때문이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한 곳에 모여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인간적으로 보자면 저주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은 것이다.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 곁에서 일을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그들의 기업으로 얻을 자들이다.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18:2).

그러면 무엇이 레위인들을 이렇게 저주에서 복된 상태로 바꾸어 놓았는가?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이들의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제사장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 때문이다. 희생 제물 밑에서는 저주가 복으로 바뀌어지게 되어 있다. 희생 제물을 근거로 해서 제사장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 아래에서 저주가 복으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레위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바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똑같이 은혜를 입은 자라는 고백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존종시되고 그의 자비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 땅이다.

때문에 레위인들은 다른 12지파 모두가 다 필요로 하는 가문이다. 만약에 레위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문이 있다면 곧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병원이라는 것이 한 곳에 뭉쳐 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두에게 다 필요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각 지파에 모두 분산되어서 도피성에서 조금씩 모여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이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통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 된다. 과연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만한 생활인가 하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위인은 폭로자, 고발자의 기능으로 이스라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는 앞에서 이야기한 레위인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성의 또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의성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하여 피할 것을 마련한 것이 도피성인데 요단 건너편에 셋, 가나안 땅에 셋을 두도록 말씀하셨다.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14).

이 도피성에서 복수를 피하도록 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피성 자체가 무조건 살인자를 위한 장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주셨다는 것은 땅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의미로 주신 것이다. 살인을 했다는 것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땅에 죄인의 피가 흘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땅이 깨끗해지려면 피를 흘리게 한 그 당사자가 자기도 피를 흘려 책임을 다 감당하는 경우에만 땅이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이런 점에서 도피성이란 살인자가 흘린 피를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땅의 저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이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또한 도피성이 있는 이유이다. 즉 제사장이 약속의 땅에 흩어져 살면서 도처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헤와 자비성을 신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장소로서 도피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가? 25절에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라고 했다. 자기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서 살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제사장 밑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던 사람, 환언하자면 대제사장의 생명을 얻어서 살던 사람이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그도 함께 죽어 버린 것이다. 죄인으로서는 그는 죽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새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피를 흘리고 대신 죽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땅을 더럽힌 장본인이 바로 라고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우리의 피가 아닌 그리고 구약에서 흘린 동물의 피가 아니고 죄 없는 예수님의 피흘리심, 하나님은 그것을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로 받으신 것이다. 레위인이 도피성에서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 그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약속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의 생활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지 세상과 세상의 것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범위는 단순히 사람만 아니라 인간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놓이게 된 모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스도 안이란 하나님과 연합된 개념이다.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주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곳에만 거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나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밀쳐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은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멸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소용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 성도들이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다 어두운 생활을 할 때 혼자 공개해도 괜찮을 만큼 떳떳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비가 지속된다고 여겨질 만큼 하나님의 복과 도움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쳐다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망상에 사로잡힌다. 자신은 항상 상대방보다 낫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선 고발자, 폭로자의 기능으로 서는 자가 구약의 레위인이고 오늘날 성도이다.(1999.4.1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