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29.민수기 33:1-56 애굽에서 모압까지의 여정

불편한 진리 2015. 2. 1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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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3:1-56

애굽에서 모압까지의 여정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요단 이 편의 땅을 요구했던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울 것을 다짐받았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써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제까지 애굽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오기까지의 모든 광야의 과정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 하에 그 항오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1,2).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라고 한 것은 비록 모세와 아론의 지도하에 그들이 인도되어 나왔지만 그들을 실제로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의 명대로 왔지 그들이 임의로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인도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모세라는 인도자를 세웠다. 하나님은 모세를 인도자로 세우기 위하여 미리 모세에게 하신 일이 있다. 모세는 처음에는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힘을 내세운 구원의 행위는 하나님이 거부하셨다. 그 때문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게 되었다. 거기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가 80세가 되어 힘이 없고 늙었을 때에 부르신다.

모세는 나이 들어 힘이 없음을 내세워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 이적을 보여주시고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모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이렇듯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먼저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보여주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신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얼른 목사라고 쉽게 단정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하나님을 아는 분은 따로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알았기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 십자가 때문에 성령께서 오늘날 자기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이 땅에는 없다. 목사도 아니다. 오직 성령이시다. 로마서 8:26,27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고 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라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신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다. 우리가 충만이라는 말도 차고 넘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온전히 죽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주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과정을 길게 말씀하심으로 애굽에서 출발하여 광야를 지나고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욕심을 죽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약속의 땅에 건너기에 앞서 모압 평지에 와 있는 이러한 상황까지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보자면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가지고 이제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보증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약속의 땅에도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땅을 빼앗는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한 발짝도 물러섬이 있어서도 안되고 그 땅의 거민들과 타협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1-53).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몰아내고파멸하며훼파하고라고 말씀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있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상과 우상의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축출하고 완전히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으로 볼 때에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죄와 죄를 범하는 인간을 분리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죄와 죄를 짓는 인간에게까지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파에서 말하듯이 구원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며 죄를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그것이 죄가 안 된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인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7:17에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말씀이나 7:20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씀한 것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으며 자신이 행하는 것은 죄가 안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죄의 실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서 죄라고 하는 실체가 바울 자신을 사로잡고 늘 죄를 범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죄를 범하는 것이나 범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밝히기 위함이다. 때문에 인간은 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어 맡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이다.

결국 우상이란 예수를 믿었다고 내 안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예수를 믿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우상을 좇아가며 죄를 짓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상이란 단순히 하나님 외에 무엇을 만들어 놓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자체가 바로 우리에게 우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20:4,5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전제 사항이 너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우상이란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고 하셨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또한 우상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자신을 위하는 자식이라면 자식이 우상이고, 자신을 위한 남편이나 아내라는 그것도 우상이고, 심지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 생각한다면 교회도 우상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표적을 일으키는 예수를 찾고 헬라인들과 같이 자신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예수를 찾는다(고전 1:2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다(고전 1:23).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걸러 넘어질 자는 걸려 넘어지고 십자가 안으로 들어올 자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우상을 완전히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순종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아셨다. 그러면서도 앞에서 장황하게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55,56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결국 가나안 땅의 요소가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될 것이다(1999.3.2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