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28.민수기 32:1-42 요단 동편을 요구한 두 지파

불편한 진리 2015. 2. 13. 21:25

28

민수기 32:1-42 

요단 동편을 요구한 두 지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요단강까지 와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그래서 르우벤과 갓 자손이 이렇게 요구하게 된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5).

당시 이스라엘은 가축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빌미의 되어 그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가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족이 없고 풍부하다는 것이고 가축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생애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관심을 가축을 키우는 일에 두고 사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 동편에 있는 야셀 땅과 길르앗을 땅을 바라보니 그 땅들이 가축을 키우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서만 살면 가축은 더 번성을 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삶은 더 풍부해 질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에서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라는 것으로 옮겨졌다. 아니 애초부터 하나님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모세는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14)라고 하면서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 과거의 사건을 예로들고 있다. 여기서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라고 한 것은 조상들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며 약속의 땅에 장대한 자가 살고 있고 이스라엘보다 훨씬 힘이 센 자들로 보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죄와 동일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요단의 이편 땅, 즉 가나안 건너 편 땅을 주고 싶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지파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이다(33). 따라서 하나님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요구한 땅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요단을 건너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 대해 하나님은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형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들만 생각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은혜는 약속의 땅, 즉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과연 은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풍요롭게 잘 사는 것인가? 교회가 숫적으로 부흥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것들은 이 땅의 것이다. 위엣 것,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 땅에서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것에 울고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19,20)고 하셨다. 그러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6:21,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것을 보고 있는가 땅의 것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6장의 결론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6:33). 하늘에 관심을 둔 자는 하늘의 것,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 그분의 나라를 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신앙인가? 6절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라고 모세가 책망한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싸워야 한다는 것에는 마음 두지 않고 있다. 오직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땅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고 그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군대가 싸움을 포기하고 있다.

자기들만 편안하고 쉴 수 있는 안식처만 있으면 될 문제가 아니다. 미디안과의 싸움에서도 보여주셨듯이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한 부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다. 가나안 족속들 역시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21). 하나님은 그것을 이미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각 지파별로 1,000명씩을 뽑아 전쟁하게 한 것을 통해 보이셨다. 그러나 르우벤과 갓 지파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약속의 땅에 가서 이스라엘의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이다. 지금 르우벤과 갓 지파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 마디로 신앙이란 싸우는 것이다. 민수기의 시작은 싸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군대로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이기 때문이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원수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다. 곧 르우벤과 갓 지파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다면 자신을 죽이도록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고 부단히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것으로 싸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편이라고 전제하고 원수를 찾고 있다. 목사의 목회 방침에 거부하는 놈이 있다면 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고 교회에서 왕따로 만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개 교회 목회자를 중심으로 뭉쳐 다른 교회와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란 목회자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약속이 중심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는 말은 무슨교단 어떤 교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성도란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죽게 하시기 때문에 죽는 싸움을 하는 자들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자랑할 수가 없고 교만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힘없고, 믿음없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순교란 있을 수가 없다.

목사로서 제가 속해 있는 교단은 재건이라는 교단이다. 재건교회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고 갖은 고생을 다 한 사람들이 해방이 되자 나와서 신앙의 재건을 부르짖었던 자들이 모여서 세워진 교단이다. 그러니 재건교회의 사람들이라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신앙의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교회에 대고 제가 진정한 순교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말에 대해 꼬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원수로 보는 사람들은 그 말을 공감하였었다. 자기 자신을 원수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일들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말씀대로 종들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27)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비로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처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죽는 자에게만 천국이라는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주시듯이 천국은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교단이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중심에 있다면 항상 걷어낼 줄 아는 자가 성도이다(1999.3.1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