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32.민수기 36:1-13 슬로브핫 딸들의 기업

불편한 진리 2015. 2. 1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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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6:1-13

슬로브핫 딸들의 기업

 

35장에서 하나님께서 도피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피해야할 도피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사는 삶의 큰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33,34).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란 땅을 더럽히지 않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36장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민수기 27장에 보면,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현손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 와서 자기들에게 기업을 달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그 지파 중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아버지의 기업을 딸들에게 줄뿐만 아니라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가 되게 하였다. 그런데 길르앗 자손(슬로브핫은 길르앗의 손자) 가족의 두령들이 여기에 문제점이 있음을 생각하고 이렇게 요구하게 된다.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감삭되고 그들의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 제비뽑은 기업에서 감삭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감삭되리이다”(3,4). 즉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업을 받았지만 만약 이들이 다른 지파의 사람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그들이 물려받은 기업도 함께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집안 전체로 보면 기업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발견한 집안의 어른들이 모세에게 나아와서 그들의 염려를 모세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로 하여금 그 지파 안에서만 시집가게 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므낫세 자손들이 유산을 다른 지파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부모에게서 유산을 받는 문제에 여자들도 많이 받아야 하는 정당성을 제시받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5절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요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딸들에게 기업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에 시집은 집안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라는 한 마디만 덧붙였더라도 이런 문제는 새삼스럽게 제기될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닌가?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조그만 결함도 생각지 못하시는 분이며,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지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사전에 다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말이 사건이 터지면 그제야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때마다 사건에 따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며, 또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세세한 일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매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늘 그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므낫세의 자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은 그들이 기업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각 지파에게 주어진 기업이란 자손 대대로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지파에게로 가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의도를 므낫세 자손들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자손들의 요구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기업의 성격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다.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6-7).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지킨다”(7,9) 혹은 보존한다”(8)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므낫세 자손들이 기업을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온 이스라엘 지파가 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기업을 소중히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신 기업이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혼이라는 것도 기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들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사에 있어서 결혼을 무척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한 번 하는 결혼인데!’라고 하면서 온갖 사치를 다 부려서 거창하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추어서 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치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려고 하는 것을 시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정신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결코 한 몸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분과 한 몸 되었다는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측면, 즉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보여주는 도구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로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차원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업에 대한 문제를 왜 이토록 강조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해 강조하고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은 땅의 중요성이다.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창조 행위를 계속 담아내고 있다는 데서 중요한 것이다. 인간들은 천사처럼 날아다니는 존재가 아니다. 애초부터 지음 받은 의도가 땅 위에서 땅을 다스리고 보존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나서 땅에 살고 있지만 땅의 위협을 받고 땅의 저주 속에 살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은 싫든 좋든 땅 위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죽어서 음부에 간다는 것은 당시 세계관으로서는 땅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땅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생각했고, 반대로 땅을 소유할 수 있고 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지하게 하신 것은 가나안 땅 자체가 지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땅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어떤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 고로 약속의 땅에 산다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이요 그것이 곧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은 가나안 땅으로서의 부동산을 소중하게 여기는 의미가 아니라면 동일하게 우리 역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복이나 선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복이요 선물인 줄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 집이 없어도 이 땅에 거처를 삼을 수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감사하는 모습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아닐 것이다.

 

민수기는 군대의 수를 헤아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민수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제대로 된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 때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적들을 원수로 규정하시고 친히 싸우시며 주의 적들을 물리치셨다. 이스라엘 알지 못하던 원수까지도 하나님께서 미리 조치를 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군대로서의 가나안 땅에 진입은 원망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실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이름 붙이기에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에게 일일이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시며 약속을 확인시키셨다. 결국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까지 와서도 하나님은 므낫세 자손과 그 가족 안에 있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질 기업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기업이 지켜지도록 하였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간 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10-12).

엄밀히 말하자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속하지 않은(하나님의 군대로 계수함에 들지 않은) 자들이었다. 즉 군대 아닌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이 의도하신 바를 드러내시며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민수기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항상 그러하다 인간의 실패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실패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고 십자가의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안에서만 비로소 주님과 더불어 죽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에 대한 공로를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으로만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1999.4.1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