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27.민수기 31:1-54 미디안과의 전쟁

불편한 진리 2015. 2. 12. 18:01

27

민수기 31:1-54

미디안과의 전쟁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28-30장을 통해 말씀하셨다. 이제 본 장에서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모세를 통해 치루어야 할 전쟁이 있음을 말씀하신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여기서 중요하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이제 앞으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될 여호와의 전쟁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어떤 기준과 정신으로 전쟁에 임해야 하는 것이며 전쟁한 후의 그 전리품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이시기 위하여 규례를 정하여 제시하신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시하시기를 각 지파별로 천 명씩 택해서 미디안과의 싸움에 내보내라고 하셨다. 2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라고 표현한 반면, 3절에서는 여호와의 원수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원수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가? 이 말은 단순히 미디안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은 아니다.

그 근거를 16절에서 볼 수 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수기 25장에 보면, 미디안은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고 하였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들을 통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하도록 유혹했었다. 이 때문에 염병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이 죽었던(25:9) 사건이 있었다. 즉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끔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어그러진 길로 가도록 한 원수라는 뜻이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미디안이 원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길로 나가도록 하는 그 무엇이 원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하나님이 싸우셨던 대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다. 그러나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원수가 되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바로의 사고 방식자체가 원수가 된 것이다.

바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기를 요청했을 때에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면서 거절했었다(5:2).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10재앙을 내리시면서 애굽과 싸우셨던 것이다. 즉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과 다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미디안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언약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어떤 국가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되는 사고방식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거부하거나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하며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원수로 규정하신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에 단순히 불신자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반대하는 요소는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러한 요소를 가진 나 자신이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대하여 각 지파에서 일천 인씩을 싸움에 보낼지니라”(4)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모세는 12,000명을 무장하여 보냈다. 각 지파별로 이렇게 전쟁에 보내는 이유는 아마도 이스라엘 전체의 전쟁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일어난 일부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각 지파별로 1000명을 뽑아 보냄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뜻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모세가 매지파에 일천 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라고 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직접 나가지 않고 그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이 일이 맡겨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 역시 민수기 25장에서 그 근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디안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인한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에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었다(25:6-11).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의 언약,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다(25:12,13).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질투를 가진 자가 원수된 자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평화요, 제사장 직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늘 여기서도 비느하스에게 동일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질투심을 가졌던 자가 원수들에게 복수를 함으로써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완수하도록 하셨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분명히 여호와의 질투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또 여호와의 질투를 가진 사람만이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모세는 정결법과 전리품을 분배하는 규레를 선포하였다. 군인들과 포로들을 제 삼일과 제 칠일에 물로 씻게 하고 의복류를 빨게 하고 불에 타지 않는 것은 불을 지나게 하고 그리고 또 물로 씻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진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고 부정하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접하고 죽이며 그것을 취급하여 그 사람은 필히 더러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에는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 후에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삼일에도 깨끗하게 하고 칠일에도 깨끗하게 한 후에 들어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모든 것은 죄악으로 오염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미디안이며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이러한 근원적인 싸움을 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님은 비느하스와 같은 질투심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예수님이 마귀와 가장 치열한 싸움을 했던 현장이 십자가였다. 그로 말미암아 죄악이 멸망을 받았고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26절에 보면 미디안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계수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백성들 전체와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이다. 전리품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라고 했다. 그리고 28절 이하에 의하면 군인들이 받은 전리품 중에서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리고(28) 백성들에게서 오십분의 일을 취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다(30).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자나 나가지 않은 자나 동일하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전쟁에 참여하여 무엇인가 했다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백성들에게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승리 안에 산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복음과 대치되는 것들과 싸우도록 이끄시는 영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공회의 위협에도 조금도 누그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19,20)고 외쳤던 것이다.

복음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를 가지고 복음을 나타내는 자이다. 십자가로 일하시는 성령은 곧 질투의 영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왜곡되게 만드는 죄의 본성, 곧 세상과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싸움이기에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복음 안에 살지만 동시에 미디안과 같은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을 지닌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약의 원수로 복음에 도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이 일에 물러서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999.3.7./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