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25.민수기 28:1-29:40 제물과 절기에 대한 규례

불편한 진리 2015. 2. 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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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8:1-29:40

제물과 절기에 대한 규례

 

28, 29장은 제사에 대한 규례를 길고 지루하게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길게 다시 제사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굽에서 빠져나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이 모세에서 이제 여호수아에게로 맡겨졌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이란 결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심으로 보여주셨다. 이제 여호수아에게 성신을 주셔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정신의 소유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제사 규례를 통해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인도자일 때나 여호수아가 인도자일 때나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하나님의 언약의 가장 핵심되는 것은 곧 제사에서 나타나는 희생의 피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애굽에서 건지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자기 희생의 피를 문에 바르는 것으로 애굽에서 빼내셨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이란 모든 관심을 피에 두고 살아야 한다. 피가 이스라엘을 영원한 가나안 땅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28:31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상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상번제는 28:4에 의하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임을 알 수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피로써 시작하고 마칠 때에도 피로써 마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식으로 매일 아침 QT나 기도로 시작하고 또한 저녁 자기 전에도 QT나 기도로 마치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2)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은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다.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의 기쁨의 향기인 화제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기쁨의 향기로운 화제란 곧 불로서 제물 전체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사는 것이 은혜인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 그 자체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에 의해 흘려지는 희생의 피,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피가 곧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며 식물이며 향기로 삼으시겠다고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원칙이다. 때문에 상번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 피와 피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다운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9장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상번제에 추가해서 다른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 월삭,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제사를 이야기하면서 모두 상번제에 추가해서 드리라고 하신다. “이는 매 안식일의 번제라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28:10). 이러한 말씀이 28:15, 24, 31, 29:6, 11, 16, 19, 22, 25, 28, 31, 34, 38에 계속 언급되어 있다. 매일 상번제로 드리는 희생의 근거 때문에 속죄일도 있고, 안식일도 있으며, 월삭도 있고, 유월절, 오순절 등의 절기 제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희생의 근거 없이는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희생의 제사를 기뻐하시는가? 그것은 화제 속에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로써 태워져서 재가되는 제사는 철저한 희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제사를 상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희생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이 이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닮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지닌 자를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며, 유월절 희생의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이 예배다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 의미는 왜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해진 예배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교회의 정해진 예배조차 부정하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모습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허다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로마서 12:1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항상 주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29장에서 7월 한 달은 제사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1-6절은 나팔절, 7-11절은 대속죄일, 12-38절은 초막절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각기 절기는 따른 제사나 지키는 방법은 다르지만 그 공통점은 속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막절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3장이나 레위기 23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절기이지만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말씀이 없다. 이것을 볼 때에 출애굽기에서의 추수의 의미는 장래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먹는 것에 두고 있지만 민수기에서는 곡식을 추수하는 의미는 사라지고 속죄의 의미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추수해서 먹는다고 해서 죄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에 의해서 사랑이 공급되고 생명이 공급된다는 의미가 새롭게 실려있는 것이 민수기의 초막절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막절 자체의 의미보다 대속죄일의 연장으로서 바뀌어져 있다.

모든 제사가 그러하지만 결국 7월에 있는 제사 전체는 속죄가 중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29: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마음을 괴롭게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스스로 굴욕감을 가진다는 말이다.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시의 의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며 희생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28:26)라고 말씀하셨다(참고 28:18,24, 29:1,7,12,35). 세상은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땀흘려서 일해야 먹고사는 나라이다. 노동에는 기술과 능력이 포함된다. 기술과 능력이 있는 자는 노동의 효과가 뛰어나다. 그 사람은 자연히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뛰어난 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만큼 배부름과 안락이 보장된다. 반면에 노동의 기술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고 하위 그룹으로 밀려나게 된다. 경쟁 속에서 남을 눌러야 내가 살 수 있고, 남이 뒤떨어져야 내가 앞서갈 수 있는 세상이다.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세상 법칙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법칙이 전혀 통용될 수 없는 나라가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이 없는 안식의 나라로써 주님의 나라이다.

결국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의 노동에는 자신의 건강, 지식, 경험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의 속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노동은 철저히 배제되고 하나님의 은혜만 지배하는 나라의 모습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가 가져다주는 안식이란 어떤 것인지를 7일 성회기간동안 철저히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애굽을 빠져나와 약속의 땅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 안에서는 오직 희생되는 피만 인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피나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언약의 중보자가 흘리는 희생의 피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피의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그 피의 안식 안에 부름받은 자가 예수 믿는 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피를 믿고 하나님의 희생을 알며 그 정신으로 사는 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약속의 땅에 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때문에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노동을 그만두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는 세상을 살 때 자기의 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며 산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교회란 그것을 이미 앞당겨 사는 자들을 두고 말한다. 세상은 열심히 일해서 벌어놓은 것으로 살아가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해서 얻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흘리신 고귀한 피로 인해서 얻은 은혜 안에서 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천국이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1999.2.1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