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5.고린도전서 12:1-11 성령의 나타남

불편한 진리 2015. 2. 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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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11

성령의 나타남

 

바울 사도는 11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모임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여 12장에서는 예배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11장에서 여자와 남자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2). 바울 사도는 이러한 중심점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은사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은사 자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13에 의하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여기서 신령한 것이란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소유로 주어진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을 예로 들면서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2)고 하면서 성도는 우상의 이끌림을 받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주의 영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이다. 주의 영은 오직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는 역할을 하신다. 그것이 주의 영의 일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13-15).

 

성도는 주의 영에 의해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뜻이지 내가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은사에 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즉 성도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성도는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은사를 주시는 분에 의해 움직여질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고백되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은사라는 문제도 이런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은사 문제에 있어서 많은 교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은 은사를 주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은사를 자기 소유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은사를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은사의 우위를 논하게 되고 또한 은사로 인한 경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소유에 대해서는 남과 비교하고자 하는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은사는 한 분 하나님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4-6절에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신령한 것을 은사, 직임, 역사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른 면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7절에서 은사나 직임, 역사는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은사, 직임, 역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기에 신령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은사를 주신 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은사를 주시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직임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한 그분을 선포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서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은사의 종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은사의 종류에 관심을 두게 될 때 서로 비교하게 되고 차별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은사, 직임, 역사, 이런 것들을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보지 않고 우리에게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기를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한다. 즉 성령께서 은사를 통해, 직임을 통해,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이 나타난다는 것은 환상이나 꿈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하심을 주님의 일로 드러낸다는 차원이다.

그러면 성령의 나타나심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것을 8절 이하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8-10).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나타남이지 우리가 얼마만큼 큰 능력을 행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원하신 대로 각 성도들에게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아니 나누어 주신다기보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 성도를 사로잡고 계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은사이다. 때문에 은사를 훈련과 연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우리는 흔히 은사집회를 주도하는 목사들이나 소위 영적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개도 방언을 하는데 사람이 방언을 못하면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라고 윽박지르면서 방언을 하라고 명령하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방언을 연습시키고 훈련을 시키는 웃지 못 할 일까지 보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바울의 말에 근거하여 마치 은사가 명령의 대상인 것처럼 그것을 인간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로 삼으려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 편에서 이루어야 할 책임문제가 아니다.

은사들이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어디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누구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이러한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즉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은사의 종류들이 전부 다 예수님이 하시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사 지상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계속 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우리가 계속하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나타남이고 그것이 바로 은사요, 직임이고, 또한 역사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이적을 나타내어도 결코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무조건 예수 이름을 갖다 붙이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정신 자체가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정신으로 살고 있고 그분만 드러내고자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기에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나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결코 성령의 나타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우리더러 무조건 죽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가 죽은 자리에서만 주님의 일하심만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2001.7.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