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24.고린도전서 11:17-34 주의 떡과 잔

불편한 진리 2015. 2. 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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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17-34

주의 떡과 잔

 

고린도 교회는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교회였다.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개혁해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문제가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 속에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어떤 모습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고 어떤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드러냄으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몸만 남기는 작업을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어떤 문제를 고쳐나가기를 기대하면서 이 서신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만 선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8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상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상 숭배란 곧 귀신을 섬기고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너희는 과연 성도로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만 섬기고 있느냐를 물었었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 사도의 논지는 공적 예배에 관한 문제로 언급되어 11장 전반부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을 통해 예배시에 행해야 할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또 공적 예배시에 있었던 문제 중의 하나를 들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또 다른 문제는 성만찬과 관련된 무질서와 분파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교회에 모여 예배할 때 성만찬을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성만찬을 가지고 서로 분쟁하는 상태가 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성만찬은 모일 때마다 각자 자기 집에서 준비해온 것을 나누는 애찬과 겸하여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21). 또 사도행전 2:46에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초대 교회에서의 성만찬은 오늘날과 같은 예식의 의미가 아니라 실제 식사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유한 교인들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분파가 조성되게 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성찬의 의미를 설명한다. 성찬이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이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24,25).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은 해마다 조상의 기일을 기억해서 제사지내듯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의 살과 피에 내가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살과 피에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의 희생에 의해서 살아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난 자이다. 그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성찬에 참여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거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자이다. 성도란 모두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6)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오실 때까지라고 표현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것을 소망하면서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찬식을 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찬식이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전하는 수단일 뿐이다. 수단 자체가 전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는 것은 이미 유월절 식사를 통해 다 완성되었다(22:16-18). 그러기에 우리가 성찬식을 일 년에 몇 번은 해야 하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이고 나의 죽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러한 성찬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부유한 집 사람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식사를 자기들끼리 먼저 먹었다는 것은 이러한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한 몸 됨을 부정하는 처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29절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찬식의 식사를 주님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 식사와 공적 예배 모임을 통해 하게 되는 성찬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떡을 떼고 잔을 나눈다는 것은 철저히 한 몸임을 확인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모일 때 몸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대속의 은혜 안에는 다른 의()가 없기 때문이다. 한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몸과 피의 가치를 구분할 만한 조건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구분과 파당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27).

 

우리는 이 말씀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흔히 이 구절을 가지고 세례를 받지 않은 자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성찬식에 대한 광고가 지난 주일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동안 성찬에 대하여 준비하지 못한 자세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에 성찬에 참여하는 준비라고 하는 것은 새벽기도회에 참여한다든지 혹은 하다 못 해 철야기도회라고 한 번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과 같이 자기가 가져온 식사를 먼저 함으로 주님의 한 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그것은 곧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을 외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그러기에 오히려 죄악 가운데 있음을 느끼는 성도라면 더더욱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고 자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주님의 희생은 세상의 조건과 가치에 따라서 구별되지 않았다. 때문에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에는 세상적인 모습은 전혀 무시한 채 오로지 상대방도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을 무시할 때 그 사람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형제를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서 이와 같이 주님의 희생을 무시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약한 자가 나오기도 하였고 병든 자도 있었으며, 심지어 죽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30).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은 주의 만찬을 무시함으로 성찬식에 함부로 참여하면 무조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32)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과 함께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무시함으로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징계하심으로 자신을 살피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즉 성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회개함으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만찬 자체를 귀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매이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귀하게 여기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자이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자라면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나뉘어져 주님의 한 몸 됨을 확인하는 교회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이 지배되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는 지역 감정이 없어야 하고, 학력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결코 없어야 그것이 진정한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해고 이 땅에서 그런 교회(인간의 모임)의 모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아니 기대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인간의 모임에는 그런 모습이 항상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임을 통해 십자가 희생 때문에 나누어 끼리끼리 모임을 형성하고 만나려고 하는 우리의 죄악들이 항상 내 속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을 느끼고 날마다 회개하는 은혜가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은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죽어야 한다(2001.6.2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