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10.고린도전서 4:6-13 만물의 찌끼

불편한 진리 2015. 1. 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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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6-13 

만물의 찌끼

 

바울 사도는 여기서 이제까지 권면해 온 것들을 고린도인들과 자신의 실제 생활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들과 바울 자신 중에서 누가 과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바울 사도는 이미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할 충성의 삶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분쟁하는 삶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자기 자신의 삶을 대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삶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인지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바울 사도가 증거하고자 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바울 자신의 삶이 예증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삶이란 계시적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와 같은 교회 지도자들의 중요성을 너무 확대하여 생각한 나머지 그들을 중심으로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갖은 고통과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바울 사도는 먼저 자신과 아볼로의 삶을 언급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6)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였다는 것이 어떤 본을 보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함이라”(6)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록된 말씀밖에 넘어가지 않은 본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기록한 말씀은 성경이다. 성경을 넘어서지 말라는 것은 뒤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성경은 서로 대적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는 어떤 일을 해도 서로 대적하고 교만의 마음을 갖는 쪽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결코 인간을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교회 사역자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좇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을 치켜세워 분쟁을 조장하고 서로 대적한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 교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잠언의 기록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했고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목이 곧은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셨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8:13),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16:5),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만이란 단순히 인간적으로 거만하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목이 곧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며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즉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교만한 것이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높이 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늘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마음은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책망하고 있다.

 

교만한 마음은 결국 서로 대적하는 태도를 유발하고 또 서로를 구별하게 만든다. 사람이 사람을 구별한다는 것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며 종류가 다른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철저히 육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고전 3:1,3). 또한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고전 1:23,24) 성령의 가르침(고전 2:13,15),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좇아(6) 사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를 성취하셨고 또한 그를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로 성취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교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십자가에 죽고 십자가의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겸손한 삶이다.

 

바울 사도는 8-13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했던 여러 가지 시련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취했던 배부르고 교만하며 왕노릇 하려는태도를 공격한다. 8절에 보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 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미 배부른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5:6).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자각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텅빈 것으로 느끼는 심령은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구약시대부터 참된 경건의 모습은 이렇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고린도인들은 이미 배부른자로서 행세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이상 목마른 것이 없었다. 고린도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자신들의 것인양 자랑하고 교만했으며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것이다(7).

 

더욱이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 없이 왕노릇 하려고 하였다. 물론 바울 사도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왕노릇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왕노릇하는 모습은 파당을 지어 분쟁하는 모습으로의 왕노릇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으로 나뉘었던 것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실제로 자기들이 왕노릇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바울과 아볼로를 죽이기로 작정된 죄수처럼,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대우하셨다. 바울은 사도인 자신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10-13절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음의 위기에 그대로 두고 돌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태로 대우하셨다고 바울 사도는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이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10). 왜 그렇게 되었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사도란 남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받은 존재이다.

 

바울의 고난은 단지 인간적 고난이 아니었다. 바로 예수님께서 경험하셨던 그 고난에 동참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성도들에게 바로 그러한 삶을 요구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고린도인들이 자신을 본받기를 소원하고 있다(16). 사람들은 세상에 판단 받기를 원하지만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 판단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볼 때는 만물의 찌끼같은 그런 존재로만 보여질 뿐이다. 아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이 보기에 미련한 자로 살아야 하고 세상의 더러운 존재로, 만물의 찌끼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말 한마디라도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었고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산 바울과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찌끼같은 존재로, 미련한 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있는가?(2001.3.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