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레위기

17.레위기 27:1-34 서원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15. 1. 26. 21:36

17

레위기 27:1-34

서원에 대하여


본 장은 서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율법의 문제를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결코 서원한대로 반드시 지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는 반드시 언약의 말씀대로 지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건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26장에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시는 이유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을 너무도 잘 아신다(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원, 즉 인간 편에서의 약속이란 늘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의 서원이 완전하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서원에 대한 각종 조치들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서원을 했다면 분명히 신실하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서원에 대하여 무르는 방법을 본 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정가된 대로 돈을 내어야 무를 수 있는데(1-8), 여기서 사람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로 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생축이면 좋고 나쁘고 간에 바꾸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며, 부정한 짐승을 무를 때에는 정한 가격대로 돈을 내되 무르려면 정한 가격에 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내고 무르게 했다(9-13). 집도 드리려고 했다가 무를 때에는 정한 가격에 1/5을 더하여 내야 되었다(14,15). 이런 식으로 기업으로 받은 밭에 대해서도 드리는 법과 무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며(16-25), 십일조를 속하는 법(30,31) 등을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원한 것을 무르는 것을 통해 본래 너희들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알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26)라고 말씀하고 있다. 원리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다. 이 원리 원칙은 이미 출애굽 할 때부터 초태생은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릴 것으로 말씀하셨다(13:1,2).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십일조이다. 십일조란, 단순히 소득의 10%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이다.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므로 제사장에게 속한 제사장 나라임을 고백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서 복이 세상의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서원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무르려고 할 때에 기본적으로는 말씀에 정한대로 하지만 서원한 자가 가난하여 정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서원자의 형편에 따라서 제사장이 정하는 대로 무르면 되는 것이다(8). 즉 제사장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에게 속하여 있는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원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을 경우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해서 약속한 것에 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희생에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초태생을 다 죽일 때에 살아난 자들이 이스라엘이므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이 희생된 피의 흔적이다. 그것을 철저히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스라엘인 것이다. 결국 본 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서원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속박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주신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서원을 강요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서원한 것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서원을 보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교에 보면 일찍이 부모의 서원으로 인해 할 수 없어서 신학교에 왔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본인도 소위 자신에게 일어난 온갖 실패를 하나님의 회초리로 말하면서 결국 부모님의 서원대로 신학교에 올 수밖에 없었다는 간증들을 늘어놓는다. 사실은 주님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과 연관시켜서 소명을 합리화시키려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옳다, 아니라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3-37).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는데 이 땅에 있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맹세하며 서원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조차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옳다, 아니다 라고 말할지 아니하고 거기에 더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말한다는 것은 죄를 더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함부로 서원하거나 약속하는 투로 말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옳다옳다, 아니다아니다, 즉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믿는 자는 진리임을 증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나의 삶 속에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님께 서원하고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주님을 우습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혹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그 서원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는 자유함을 누리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이지 율법에 얽매이는 모습이 아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레위기 공부를 마치면서

레위기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는가?

레위기에서는 왜 인간의 피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속죄가 될 수 없는가 하는 것과 동시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만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이 된다고 철저히 밝혀져 있다. 그 어린 양의 피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일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은 입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하나가 되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밖에 없다. 예수님의 피만 구원의 능력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왜 그렇게 율법을 다시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서 주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예배당을 성전으로, 헌금을 제물로, 목사를 제사장으로, 예배를 제사로 만들고 있다. 구약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부지런히 힘을 합쳐 한국 교회를 유대교로 만들고 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는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된다. 아니 가짜 예수, 가짜 십자가만 퍼뜨리고 있다. 어리석은 민중들만 어설픈 종교 전문가들의 종교놀이에 놀아나고 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콜라보다 진하지 않으며 그렇게 무가치하고 가소롭더란 말인가? 그렇게 십자가를 믿고 싶지 않는가? 레위기는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 것)를 위한 책이던가? 좋다! 이대로 살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를 무시하는 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며 사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자기 땅에 방문하셨을 때에 그렇게 당하셨으니 내가 그렇게 당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세상살이에 눈을 부라리며 못에 핏대 올리며 아둥바둥 살지 말고 웃음으로 넘기며 살자꾸나.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