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레위기

14.레위기 23:1-24:23 절기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15. 1. 2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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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3:1-24:23

절기에 대하여


출애굽기 34:18이하에서 무교절(유월절)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21-2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참고 출 23:14-17).

이스라엘의 절기는 세 번의 절기를 주기로 순환한다. 그 사이에 또한 다른 절기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을 레위기 23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본 장은 안식일(3), 유월절과 무교절(4-8), 초실절(9-14), 칠칠절(15-22), 나팔절(23-25), 속죄일(26-32), 초막절(33-44)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안식일(3)-출애굽기 34:21에서 세 절기에 대해 말하면서 안식일을 말씀하고 있듯이 본문에서도 먼저 여러 절기들을 언급하면서 먼저 안식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서두에 안식일을 언급한 것은 모든 여호와의 절기들은 안식일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안식이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에서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는데 출애굽 때에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셨다(20:8).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현실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고 거기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가나안 땅이 아닌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안식이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을 기초로 해서 절기들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을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 어디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 마디로 안식이다. 그것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안식 안에 있다는 것이다. 광야에 있으면서도 안식이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관계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다스림을 받는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금 이스라엘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다스림을 받는 상태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다. 인간의 죄 때문에 안식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근거를 보이시는 것이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해의 시작이 되게 하신 첫 절기를 통하여 보여주신다.

유월절과 무교절(4-8)-유월절은 114일이고 무교절은 115일부터 7일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첫 날이 안식일이고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다. 즉 안식일로 시작해서 안식일로 마친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무엇 안에 있는가? 혹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유월절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희생의 피 때문에 죽지 않고 생명이 보존된 상태로 살아 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안식의 상태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7일간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먹는 것으로 애굽에서 나온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면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유월절로 해의 첫해가 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12:2). 전혀 다른 피조물로 새로운 세계에 산다는 뜻이다.

초실절(9-14)-초실절이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제사장이 그 단을 흔들어 여호와께 바치면 번제와 소제와 전제의 포도주로 제사를 드리는 날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10)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주셨을 때에 지킬 수 있는 절기이다.

그렇다면 그 땅에서 나는 곡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대한 감사이다. 땅의 곡식은 땅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땅이 없다면 곡식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초실절을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언약하신대로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절기이다. 결코 곡식 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얼마나 무엇을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는데, 이 본문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추수감사헌금을 거두면서 많이 헌금하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 본문은 결코 오늘날 추수감사절기를 지키며 추수감사헌금을 많이 드려야 하는 당위성을 지지해 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이 절기를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으로 말미암은 감사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서 난 곡식을 소유한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으로 드린 감사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소유하였는가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소유당함에 대한 감사가 날마다 있는 자가 성도이다.

오순절(15-22)-이 절기는 첫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 또는 칠칠절이라도 부른다. 이 절기는 수확을 공식적으로 마무리짓는 성격의 절기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곡식을 거두게 되었으니 제사를 드리면서 모두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주시는 식물을 함께 먹는 한 식구라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혜의 풍성함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까지도 누리도록 하셨다(22).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누리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다.

나팔절(23-25)-71일로 안식일을 삼으며 나팔을 불며 아무 노동도 하지 아니하고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절기이다. 문자적 의미는 기억하기 위한 나팔 소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것은 출애굽기 2:24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심과 관련된 말이다. 또한 출애굽기 19: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강림하실 때에 나팔을 불었다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속에 항상 강림해 계심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알고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팔절이 종교력으로는 71일이지만 민간력으로는 11일이다.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날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나팔 소리로 표현하고 있으나(24:31, 고전 15:52, 살전 4:16, 8-1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속죄일(26-32).-710일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는 날로 곧 대속죄일이다. 이 날에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27,29:금식), “큰 안식일”(16:31)로 지키며, 대속의 제물을 드리고,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여야 한다(16).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요 속죄함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했다(29,30).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또 다시 제사드릴 것은 없지만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죄인됨을 깨닫는 중에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됨을 알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데서 십자가의 긍휼과 은혜는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초막절(33-44)-715일부터 7일간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그 초막에서 생활하는 절기로 수장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한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때에 장막 생활했던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때는 장막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약속의 땅에서 정착된 집에서 살게 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성도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로 알고 결국에 모든 것을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1:36).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7가지 절기들은 시간 속에 사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생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도록 허락된 절기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출애굽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고,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며, 농사짓고 수확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평화를 누리고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낮아지시고 희생하심 때문인 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절기들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시간 속에서 지켜야 할 절기들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져서 살 수 없는 민족이다. 오늘날 믿는 신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계산과 수완으로 사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심으로 다시 살게 된 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이며, 오늘날 교회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24장에서 성소의 등불과 진설병에 대한 관리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23장의 절기들, 24장에서의 등불과 진설병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사건, 25장의 희년에 대한 말씀이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23장에서 이스라엘이 절기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아야 되었다면 단순히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 년내내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 애굽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다운 언약정신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소에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맞은편에 등대에 불을 계속적으로 밝혀두어서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밝히 비추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이스라엘은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그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는 자이다. 언약대로 산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삶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 곧 애굽적 사고방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지만 그 아비는 애굽 사람인 한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사건을 들어서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이런 애굽적 사고방식이 왜 자녀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 책임을 하나님은 부모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0절에서 그 부모가 누구인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 애굽 사람은 자식에게 애굽의 사고방식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애굽적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한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의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애굽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를 돌로 쳐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낼 수 있는 안식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소에서 등대로 비춰지는 열 두 덩이의 진설병과 같은 상태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안식, 곧 천국의 모습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무엇이 죄악의 길이고 죄악의 길이 아닌지 결코 알 수 없다. 성령께서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신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과 반대되는 모든 세상적 정신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