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레위기

12.레위기 18:1-20:27 생활에 대한 규례들

불편한 진리 2015. 1. 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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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8:1-20:27

생활에 대한 규례들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그 죄 때문에 인간의 피는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낱낱이 말씀하신다. 그것과 더불어 주어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들어 있고, 그 어린 양의 희생을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은 여기 18-20장을 통해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확대해서 보여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18-20장 말씀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또는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냥 쉽게 나는 하나님이니까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선언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란 피의 대속을 입은 자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도무지 탈출할 여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직접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희생 속에 있다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만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건짐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사는 자이다.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20:22).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걸 맞는 말씀대로 시행되는 백성이 될 때에만 약속의 땅에 사는 것이 용납되어지는 것이다. 약속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십계명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고 거부하시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좇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8:3-4/ 참고 20:23).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요 유월절 희생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거룩이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18장에서 주어지는 규례도 단순히 사회적으로 성윤리를 문란하게 만들지 않음으로 건전한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속에 누구의 희생이 들어있는가를 늘 확인하라는 뜻이다.

당시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은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범죄하는 풍습이었다(6). 자식이 어미를 범하는 것(7), 계모를 범하는 것(8), 이복 자매(9), 손녀나 외손녀(10), 이복 여형제(11), 고모(12), 이모(13), 숙모(14), 시아비가 자부를(15), 형수나 제수를 범하는 것(16) 등이다. 뿐만 아니라 여인과 여인의 딸을 아울러 범하며,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까지 함께 취하기도 하는 것이었다(17).

아내가 살아 있는데 또 처제를 취하여 분란을 일으킨다(18). 심지어는 자신의 정욕으로 인해 경도하는 여인과의 관계나(19) 타인의 아내를 취하는 것(20), 호모행위, 남색(22), 짐승과 교합하는 일(23), 또한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만드는 일(21)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고대 사회의 이방종교에서는 혼음을 통해 다산 기원 의식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다(34:15-17).

이러한 모습이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이며 또한 오늘날 세상의 풍속이다. 하나님은 근친 관계 속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관계를 통해 인간의 정욕에 의해 범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만 좇지 않으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좇아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시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속에 있지 않으면 항상 죄의 본성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정상적인 부부간의 결합이란 배필간의 연합이다. 즉 마음과 몸이 한데 뭉쳐지고 인격이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타내는 것으로 보지 않는 한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죄된 모습요 당연히 멸망되어야 할 모습이다. 그 모습이 바로 애굽의 모습이었고 가나안 족속들의 모습이기에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또한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가나안 족속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4,25).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약속대로만 통용되는 땅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규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땅이 토하여 내게 되는 것이다(18:28, 20:22).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이 나왔던 땅이나 들어가야 할 땅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약속을 주신 여호와이심을 알고 그분께 속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규례대로 사는 것이다.

애굽의 풍속이나 가나안의 풍속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가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애굽이나 가나안 땅의 풍속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하등의 차이가 없다. 다 같이 자기 자신의 힘과 정욕대로 살아가는 풍속이다.

세상은 자기 힘과 욕심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존재들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대신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피가 되기 때문이다.

19:19에 의하면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혼합하면 단순히 좋지 않다거나 생물학적으로나 생활적인 면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될 우려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불이익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챙기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생활 깊숙이 전반적인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20장에서 아주 길게 말씀하신 간음에 대한 문제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것은 음행으로서 한 남편에게, 한 아내에게 속한 것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했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세상과 공유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 즉 하나님에 애굽에서 건짐 받은 자들은 그 소속이 하늘이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될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사는 곳은 하나님 안이요 희생의 피 안에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규례는 제사에 관한 문제와 일반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로 구분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고상한 삶을 살 것이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삶이 종교적 삶과 일반적인 삶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밝히고 드러내는 하나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의 신앙생활이란,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직장생활로 나누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삶의 전 영역이 항상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하나의 삶이다.

19:23 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땅에서 과목을 심어 얻어진 열매는 3년 동안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4년에는 모든 과실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땅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되는 땅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약속에 의한 은혜의 열매들을 베풀 때에 살 수 있는 땅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지되는 땅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교회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의 성전이 되었다. 곧 그분의 거룩 안에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결코 명령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20:8). 거룩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규례를 지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은 Q.T(경건의 시간)를 함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냥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 안 되는가? 그것을 왜 꼭 Q.T라는 이름을 붙여서 매일매일 해야 되는 것으로 여기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완벽하게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냥 말씀대로 사는 자로서 진짜 세상은 하늘나라임을 알고, 이 세상은 허상이요 거짓된 것이며, 죄악된 것임을 날마다 폭로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형성된 문화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항상 죄된 것으로 주님의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문화에서 어떤 것이 나은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다 애굽적인 것이요 가나안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거부하도록 노력하면 주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것을 모조건 거부한 상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 나라에 대해 관심 가지므로 세상의 것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멀어지는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술 먹지마! 담배 피우지마! 세상의 오락을 즐기지마!’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는 것이 성도다운 것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도다운 것은 아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너무 좋고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의 것에 흥미를 잃고 싫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실 때에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생명나무를 먹는 것에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주님께 속한 존재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