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표적을 보는 믿음
요한복음 4:43-54
성도들이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은 종교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등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식상해 합니다.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늘 들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만 들어도 다 아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 전도, 헌금, 봉사생활 등은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온 사람일수록 심합니다. 더욱이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이라면 으레 다 알고 잘 알아서 교회 일에 대해서는 경험이 풍부하고, 웬만한 성경본문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늘 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당장 급한 일이 생기거나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교회로 달려와서 자기의 기분을 풀려고 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서 뭔가 큰 이적을 베풀어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주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가에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먼저 말씀을 통해 지적받지 않으면 십자가의 주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셔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절)고 하시면서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50절). 그 신하는 집으로 가다가 종들을 만나서 말을 들으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나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대하여 쉽게 생각을 해서 “보아라 이적이란 믿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니 우리도 이적을 구하자 그러면 주님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실 것이고 그 이적을 통해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48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영접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45절에서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때문에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릴리 사람들이 믿는 것은 표적이었습니다. 신기한 이적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말씀하시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이적으로 인해 자신들의 병이 고침을 받으니 그 유익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근거를 2:23-2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사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이적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아무에게도 의탁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근본적인 인간의 속성이 주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방향으로 있다는 것을 잘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에 만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갈릴리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이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표적을 보는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당장 닥쳐진 어려운 문제 해결을 위해서 표적을 믿는 인간의 속성과 탐욕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에 있어서 찾아가셔서 이적을 보여주시는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방법으로 하신 것입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고침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분이 하신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는 싫고 당장 가로 놓여진 문제가 해결되게 하는 이적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리는 자이기 때문에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말씀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표적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시는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천국은 질병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질병에서 놓임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표적을 통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인간을 죄의 권세에 묶어놓는 실질적인 세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됩니다. 질병을 고치시는 표적을 통해 마귀의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표적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아야 할 표적은, 질병을 고치는 표적이 가리키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적으로 거기에만 매달려 있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 내가 주님과 말씀의 관계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직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이 존재하시는 것으로 여긴다면 내가 하고 있는 예배, 전도, 봉사, 헌금 등은 종교 생활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종교생활을 잘 이루어 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종교 생활이란 항상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반복되는 행위일 뿐입니다.
신자가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짜릿하고, 충격적이고, 신선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아래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계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죄의 속성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탐욕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갈릴리에서 이적을 추구하면서 주님을 환영한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내가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면 주님은 갈릴리에서 당하셨던 모독을 똑같이 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는 표적은 오직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표적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유일한 표적인줄 알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이적들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는 헛된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1996년 8월 11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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