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12.요한복음 5:1-18 안식일

불편한 진리 2015. 1. 21. 17:06

12

안식일

요한복음 5:1-18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가지는 목표 또는 비전(vision)이 있습니다. 그 목표나 비전은 다 자기를 편하게 하고 유익하게 만드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직장이라는 것도 가능하면 보수가 많고 편안한 직장을 찾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답고 편안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것을 절제하고 또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자합니다. 안락한 삶으로 살아 보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목표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늘 쫓기는 생활을 하다시피 합니다.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참된 안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못 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못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결과에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설 때문에 많은 병자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유독 한 사람만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병고침 자체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병자입니까? 38년 된 병자입니다. 38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고칠 수 없었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예수님의 질문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38년 동안이나 누워있었다면 낫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봅시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나이다”(7).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가 넣어주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데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병자가 원하는 것은 이 못에 넣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 곁에 그리스도로 오셨지만 그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고침을 받기를 원하였지만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병고침에 대한 해결책을 믿고 그것을 예수님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위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구원방법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 갈려고 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넣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데스다는 경쟁하는 곳입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서 자신이 고침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 오셔서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 예수님은 왜 그냥 걸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까? 지금은 안식일입니다. 그렇게 목숨이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왜 하필 안식일에 이렇게 행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날 하셔도 되는 일인데 왜 안식일에 고쳐주셔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문제거리로 삼게 하시는 것입니까? 유대법에 의하면 생명의 위급이나 또는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을 힐난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물건을 들고 가는 행위는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을 어기게 한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력을 상실하고 형식과 율법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유대인들은 38년 동안이나 질병의 고통에서 놓임 받은 엄청난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정죄하고자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병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어떤 것이며, 또한 반대로 죄의 권세에서 놓인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고침받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그러한 비참한 상태이고, 안식이 되시는 주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상태가 바로 고침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실로 안식의 상태는 질병과 고통, 눈물, 결핍, 가난함 등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것들이 제거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왜 죄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게 되었습니까?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는 자연의 법칙대로 그대로 두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하나님과 늘 교제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그 상태가 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고난과 죽음과 질병 등 이런 것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이 깨어진 것입니다.

깨어진 안식을 회복한다는 것은 안식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밝히셨습니다(17-18).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자신이 안식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안식으로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안식일을 한 날로 주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가지고 안식일이 누구인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고 기능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인해 안식일(율법)이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안식입니다. 베데스다와 같은 경쟁의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경쟁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쟁함으로 천국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2:21).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미 안식을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루신 안식이요 그분 자신이 안식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안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안식 안에 사는 자는 세상의 것에 연연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안식을 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일이란 끝없이 피곤하고 우리를 계속적인 탐욕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그 재물이 우리에게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 물론 잠깐의 편안함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은 우리와 관계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잠깐의 안식을 누리고자 영생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우리의 안식되시는 주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생활 속에서 늘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199681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