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09.요한복음 4:1-26 신령과 진리

불편한 진리 2014. 11. 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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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리

요한복음 4:1-26


사람은 일생동안 끊임없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에게서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원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일생동안 밑빠진 독에 물을 채워 넣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이렇게 끊임없는 갈증을 가지고 해갈의 요소를 찾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채워지는 흡족한 경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것을 만져보고 가져보고 경험해 보았지만 그러한 것들로 해갈의 기분을 느끼지 못하면 결국 종교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내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통해서도 내가 원하는 것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책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스스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끝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았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율법을 통해서였고, 또 한 사람은 육체의 쾌락과 자기 자신의 종교생활을 통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니고데모는 유대인으로 관원이었으며 율법 선생이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없는 여인이며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던 창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사마리아 여인은 낮에 물을 길러 나왔고 예수님이 이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이 두 사건을 대조하면서 앞의 두 가지 표적에 대하여 해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천국 백성을 만드실 것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새로운 천국 백성을 만드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로 인해 성령께서 행하시는 거듭남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 성전을 헐라 그러면 3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하신 그 표적을 통해 인간들의 종교행위를 공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종교행위가 무너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새로운 예배,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면서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하여 다른 길로도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를 통과 하시는 것이 필히 되어져야 할 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반드시 자신을 계시해야할 뜻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가라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여인을 만나자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본문에서 그 이유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분열왕국 이후 북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을 끝으로 앗수르에 패망한 후 이방인과 통혼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에 유다는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따로 예배하는 분열을 초래하였고 신앙적으로는 혼합적인 측면으로 흘렀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을 적대시 하였습니다.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접근하자 의아해 했고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수 말씀에 대한 것을 이 여인은 물질적인 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를 말씀하심으로 여인은 예수님이 예언자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여인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궁극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서 예배해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은 결국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고 하십니다. 여기서 신령이란 영으로라는 말이고 진정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습니다. 육인 인간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하나님께 예배하며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받아 들여서 새로 거듭남으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자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답변은, 구원이란 사마리아 종교체제(이 산, 즉 그리심 산)가 아니며 유대인들의 종교체제(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닌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요한복음 2:21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예배할 새 성전은 지금 여인 앞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소적인 예배, 순서를 갖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로 하는 예배란 자기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전제로 한 예배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희망과 기대를 거는 태도를 말합니다.

영생은 이라는 자리에서 나오지만 육이 무너져 내린 곳입니다. 그 현장에 바로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참으로 육적인 갈등 뿐만 아니라 갈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 속에 있는 형편이라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어져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정죄된 이 여인에게 찾아오심으로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신 성령께서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그 안에서 자기를 포기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거룩함은 더 이상 예배 의식이나 희생 제사 제도, 거룩한 절기, 신성한 장소 등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거룩입니다. 참된 예배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예배, 종교 행위는 죄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거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 예배는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린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는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것을 기억합시다(참고 롬12:1).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한 자로서 주님 안에 있는 자의 삶인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식이 없이 적당한 형식을 갖추어서 거룩한(?) 폼을 잡고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에 사도신경이 빠지면 안 되고, 헌금은 설교 후에 해야 하고, 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등의 순서를 가지고 얼마나 다투어 왔습니까? 물론 형식과 틀을 벗어나면 그것이 참된 예배라는 말도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방법과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로 십자가에 던져진 삶, 생활 자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한 시간의 예배를 가지고 우리의 할 의무를 주님께 다했으니 또 한 주간 복된 생활이 되기를 기대하는 그 심보를 십자가에 못박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1996728/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