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10.요한복음 4:27-42 예수님의 양식

불편한 진리 2014. 11. 1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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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양식

요한복음 4:27-42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더 이상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을 겁을 내거나, 적당한 선에서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 전부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Q.T(큐티)를 하는 것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전제에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전제가 될 때에 우리는 내가 행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을 온통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말씀 속에서 주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인간은 왜 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로 늘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오는 동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와 보라고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해 왔습니다.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권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그러니까 제자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항상 오해가 생깁니다. 즉 인간은 어두움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는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죄인이요,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알지 못하는 육이라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존심 상해하는 자는 복음을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자존심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율법 선생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부터 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끝에 보면 예수님의 장사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아서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에는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19:39). 그러나 처음에는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에 대하여 오해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육의 상태에서 갈급함을 해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남편 다섯이나 있었느니라라고 하는 죄악을 폭로할 때에 거기에 자신을 굴복시겼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셔서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자신이 먹을 양식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은 누가 먹을 것을 갖다 주었는가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 양식이라는 것은 먹고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양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양식을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애 전체를 바쳐서 해야 할 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생애 전체를 바쳐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38-40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영생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 즉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의 권세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서 늘 대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에 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생명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생명은 피를 흘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17:11). 그러므로 피가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셔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때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9). 이 일을 가지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37-38)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일이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라고 하는 존재는 거기에 굴복되어졌을 뿐입니다.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내가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어 우리가 믿게 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을 양식으로 삼지 않는 자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먹여 살려줄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우리를 멸망으로 빨리 달려가게 할뿐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일이고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가지고 있는 목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그러한 양식이 우리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추수를 맡겨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참된 양식으로 삼는 자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아직도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내가 이루어야 할 의가 있습니까? 내가 쌓아야 하는 의, 우리 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의라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실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6:29). 로마서 4:4에 보니까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의 의가 쌓인다고 생각을 해서 주님이 마치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 보상을 반드시 해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살게 됩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내게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고 나는 채권자로서 주님을 이용하고, 내가 행한 것 이상으로 주님을 우려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마 그런 사람은 그것을 영생으로 보상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아는 자는 그저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길 뿐입니다. 십자가를 은혜로 여기는 자는 십자가에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을 양식으로 삼는 자는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자입니다.

세상의 양식은 썩어지는 것임을 알고 그것을 더 가지지 않더라도 늘 감사와 찬양이 있는 신자입니다. 그런 자는 감사함으로 헌금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 나와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헌신이요 봉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양식을 귀하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귀한 양식인줄 알고 그 양식을 위해 살아가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199684/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