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69.누가복음 22:39-53 예수님의 잡히심

불편한 진리 2015. 1. 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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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39-53 

예수님의 잡히심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성취로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들은 심상치 않은 전조를 예감하게 한다. 이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전대나 주머니, 그리고 여분의 신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22:36).

중동 지방의 낮과 밤은 기온 차가 심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에 이불과 같은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생활 필수품이었다. 때문에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겉옷은 중요한 물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새롭게 전개 될 상황은 생활의 필수품을 팔아서라도 검을 장만해야만 할 위급한 상황임을 암시한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감이니라”(22:37).

 

과거에도 그러하였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의 지도자에게든지 예수님 자신에게든지 이제 더 이상 다른 길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여질 수밖에 없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향하신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39).

 

여기서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열심히 기도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기도하되 열심히 예수님과 같이 습관을 좇아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습관이 되도록 장소를 정하고 열심히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는 말씀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이 습관적으로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도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본문이 습관을 좇아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은 오히려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의미는 47절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해 진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47).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가셨다는 것은 제자들,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장소로 가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도 잘 아는 장소로 일부러 가셨다는 것이다. 그 장소에 일부러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잡히시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그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42).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수차례 밝히신 바 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9:22).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18:31-33).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이란 구약에서 보통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말이다(51:22-23). 여기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진노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참고 요 18:11).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기도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십자가를 피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는 기도였기에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표현이 바로 43절 말씀이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43).

 

전대나 주머니를 가지고 검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어떤 상황인지 인식해야 했었다. 적어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영적 전쟁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모습 속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44).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 인식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알지 못할 슬픔의 분위기에 잡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잠시 동안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해 제자 중 하나(요한복음 18:10에서는 시몬 베드로라고 밝혀주고 있음)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다.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51)고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행위는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앞 둔 예수님은 철저히 혼자가 되셨다. 제자들조차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임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흔히 제자훈련에 대한 근거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신 제자들을 통해 결코 십자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인간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일에 우리의 기도로 물질로 도움이 되기를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다. 아니 또 그렇게 하나님께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천지를 홀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죄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구원의 일 역시 혼자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일이 주님께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마치 강도를 잡으러 온 것과 같이 무장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을 우리는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22:37).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자신을 맡기신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언약의 성취를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어떤 의도가 들어 있는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53).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이 검과 몽치로 상징화된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성전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결코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잡을 수 있게 어둠의 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놓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7-1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19:11).

 

이 모든 것이 세상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저지하려는 사탄의 시도가 배후에 있고 또한 아무리 강력한 것일지라도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말씀대로 성취되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자신의 권세로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큰 은혜요 구속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주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