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26.사무엘하 23:1-39 다윗의 마지막 말과 용사들

불편한 진리 2014. 12. 15. 14:02

26(2013.8.11)

사무엘하 23:1-39

다윗의 마지막 말과 용사들

 

본문 1절에서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라고 하였다. 성경의 장이 22장과 23장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는 22장의 본문과 달리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적인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연속적인 기록 계시는 의미의 연관성을 보여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22장에서 다윗의 찬양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노래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절 말씀을 통해서 보면 본문에서 다윗이 마지막 말로 노래한 시는 결코 다윗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주어진 계시로 아브라함 언약과 연관된 메시아 언약을 확인하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라는 말을 한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입장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 자신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믿으며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단순히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 것이었다. 결국 다윗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를 소망하는 것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다윗이 말하는 내 집이라는 것은 다윗의 가문을 의미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단지 혈통적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가문을 의미한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다윗 가문은 메시아가 함께 하는 가문이라는 것을 뜻한다. 혈통으로 지탱되는 가문이 아니라 언약을 근거로 지탱이 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가문을 의미한다.

다윗은 이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함으로써 한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언약임을 언급하였다. 따라서 영원한 언약의 성취로서 오신 메시아이기에 그분이 함께한 다윗 가문은 메시아와 함께 영원하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윗 자신은 비록 죽음을 앞에 두고 있지만,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그 메시아가 영원하다는 것을 소망하며 이 마지막 말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 영원한 세계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세계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세계를 뜻한다. 다윗은 이 언약의 세계를 소망했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즉 다윗은 언약의 성취로 오실 그리스도의 세계를 소망했고,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언약이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윗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이 어떤 분을 소망했는가는 3-4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다윗이 소망했던 메시아는 이런 분이다. 그 분은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햇빛으로 땅에서 싹이 나는 새 풀과 같다고 하였다. 바로 이 분이 오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비취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소망했던 것이고 그분이 다스리는 세계를 소망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다시 오시기를 소망하며 그분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8절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다윗의 옆에 있었던 세 용사에 대해 소개한다. 23장 초두에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구절로 시작하였는데 이제 인생을 마치려는 시점에서 왜 다윗의 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다윗에게는 용사들이 있어서 그 용사들의 도움으로 다윗이 많은 이방인과 전투를 하면서 승리를 얻었고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이룩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까?

본문에서도 다윗의 용사들이 전투에 나가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전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분명 다윗이 용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용사들 중의 어떤 자는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할 때 목숨을 걸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서 물을 떠오기까지 하였다. 이는 용사들이 다윗에 대해 어떤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있어서 용사들은 분명 인간적으로 든든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0절의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의 승리는 용사들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승리를 말씀하고 있다.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힘들게 전쟁을 하였다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다는 말씀은 엄밀히 따지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에는 인간이 힘들게 노력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그 노력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표현이다.

11-12절에서 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은 용사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언급한 것이다. 결국 다윗의 모든 승리는 다윗과 함께 하고 다윗을 돕고 다윗에게 충성했던 용사들로 인한 것이지만, 정작 용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윗이 전쟁 중에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생각나서 마시기를 원했을 때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의 진을 뚫고 그 우물물을 떠왔으나 다윗은 차마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17)라고 하였다. 이 모든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분에게 돌려드려야 마땅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떠 온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린 것은 그 누구도 남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으며 그 희생 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왜 다윗이 인생을 마치는 시점에서 언급을 할까?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자신이 승리한 날들을 돌아보니 용사들이 곁에 있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것과 세상에 대한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다윗의 승리에는 용사가 있었지만 용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결국 용사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의 인생이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다윗의 세 명의 용사와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의 명단이 공개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의 나라가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로서 등극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용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용사의 희생을 대표하는 자가 세 명의 용사가 아니라 맨 마지막에 거론되고 있는 헷 사람 우리아라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도합 37명의 용사를 거론하면서 맨 마지막에 기록된 인물이 바로 헷 사람 우리아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게 되는데 전자에 기록된 세 명의 용사들에 대하여 다윗을 위한 목숨을 건 용맹과 충성심도 높이 평가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머리가 다윗이 되고 그를 백성들이 신의 대리자로 이스라엘의 등불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헷 사람 우리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여호와 전쟁의 용사로서 다윗 왕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왕의 배신과 그에 따른 죽음뿐이었다. 그후 다윗의 가문과 나라에 엄청난 재난이 닥치게 되었고 그런 재난으로 인해 다시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구약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언약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다윗이라는 한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세운 언약이 아니라 그는 어디까지나 언약의 기능자의 역할자로서 세움을 입은 것뿐이다. 그런데 비록 다윗이라도 언약의 본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리게 되면 더 이상 그와 맺은 언약은 언약의 머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언약의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우리아와 같은 희생자요 희생의 의미를 아는 다윗의 상한심령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존재 여부는 용사들의 용맹이나 그 숫자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아와 같이 가진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희생의 바탕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같은 사실은 장차 나타날 새로운 다윗 언약의 완성체이신 한 인격의 희생을 다시금 요청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희생을 감당하게 될 새로운 인물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 속에서 다윗 언약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전쟁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 주기 위해 동원된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언약의 본질을 상실한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차원과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죄와 상반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성과 언약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인데 여기에는 반드시 희생자가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을 온전히 성취하고 마무리 짓는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구원 받은 자들에게 자신의 죄를 보여 주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 직면하게 될 때 마귀는 우리의 죄성 그것 자체만 크게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성도라면 성령께서 모든 일의 끝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만드신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순간순간 또한 부분적으로 십자가가 보일지라도 인생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십자가를 확실하게 보게 만드시고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6-18)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