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23.누가복음 7:36-50 죄사함의 은혜

불편한 진리 2014. 12. 1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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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36-50 

죄사함의 은혜

 

본문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어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은 사건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책망하시고 여인을 향해서는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선언하셨다. 과연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누가는 이 본문을 여기에 기록함으로 어떤 주님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여기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고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구약의 옛 틀인 율법을 가지고는 결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문맥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해 시몬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그 이름을 알 수 있다(40). 그런데 바리새인이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초대하였는지 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40절에 보면 예수님이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말씀하시자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답변한 것을 통해서 볼 때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알고 예수님을 모셔서 좋은 말씀들을 듣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 메시야 되심을 받아들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시몬은 예수님을 모셔서 그의 말씀을 듣고 율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꼬투리 잡기 위하여 모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존경하거나 아니면 대등한 입장에서라도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는 하였지만 아주 푸대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주인과 종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는 처음부터 이 여인을 소개하면서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37)라고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그런데 유독 누가는 이 여인에 대한 수식어를 죄인인 한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자만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사회 통념적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여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취급하고 알려진 그 여인이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 뒤편으로 가서 발치에 앉아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이러한 여인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의 발을 핥는 개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몬이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아 더러운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자신을 아주 낮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주 귀중한 분으로 생각하였다는 의미이다. 향유란 더운 중동 지방에서 화장용과 겸하여 향수와 같이 사용되었기에 아주 값비싼 것이었기 때문이다. 값비싼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대란 곧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하였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시몬이 대답하였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43).

그리고는 그 다음에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과 죄인인 여자와 비교해서 시몬은 예수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아주 귀중한 분으로 알고 섬겼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시몬과 여인을 비교하신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여인은 많이 탕감을 받았기에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시몬은 탕감을 많이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적게 사랑하였다는 뜻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죄의 경중을 말씀하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 죄의 경중, 즉 죄를 물량적인 면에서 많고 적음이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죄를 물량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을 끄집어내시기 위해서이다. 시몬이 죄를 물량적인 차원에서 경중을 따지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과 다르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율법적인 옛 틀의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대접하였고, 또한 여인을 죄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몬의 마음은 39절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님은 시몬의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내어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면서 죄사함이 어떤 은혜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결론은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여자를 비교하여 여자가 많이 죄사함을 입었기에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시몬은 죄사함을 적게 입었기에 예수님을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이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선언하신 대상은 죄인인 여자였다. 다시 말해서 시몬은 죄사함을 약간 얻었는데 비해 여자는 많이 죄사함을 얻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죄사함을 입은 쪽은 바리새인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여자라는 말씀이다. 물량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물량적인 차원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경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죄사함의 은혜를 입었고 한쪽은 죄사함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대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몬은 비록 율법을 가지고 잘 지키는 바리새인이라고 할지라도 율법이 그의 죄사함을 이루어주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죄사함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이 행한 일로 말미암아 그녀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행위가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를 사함 받은 것을 확인시켜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여인은 이미 죄사함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귀중한 분으로 알았고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거기에 앉은 자들에게 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49). 율법이라는 옛 틀에서 보자면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으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기보다 건방지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본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본문은 바리새인 집에 우연히 예수님이 초청되어 가셔서 돌연 일어난 일을 가지고 말씀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인인 한 여자를 그곳에 배치하셔서 그 여인을 통해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은혜를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50절에서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이끌려 죄사함을 받게 된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란 단순히 여인에게서 나온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주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여인을 구원한 믿음이란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12:2에서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리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죄사함의 은혜를 입는 것은 율법이라는 옛 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고 어떤 의식들을 행함으로 은혜를 체험하려고 하는 입장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혜를 입었고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을 누리고 있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고귀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의 것을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