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
누가복음 7:24-35
요한과 예수님
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신다고 예언된 그 메시야가 맞는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예수님은 자신이 평소에 행하시는 그 일들을 그대로 보여주시며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구약을 배경으로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그 일들을 내가 행하고 있다는 선언을 하셨다. 메시야 예언을 하고 있는 그 일을 예수님이 행하신다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인 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죄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귀가 닫힌 자들을 듣게 하시는 일, 곧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실제적으로 그 이적들 안에 숨기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통해 십자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아직 메시야의 영광과 능력이 완전히 다 드러나지 않은 지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다면 복된 자이다. 즉 메시야의 신분과 능력을 증거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이 믿고 깨달아진다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차원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고 또한 비유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비롯한 당시의 죄인들의 상태를 폭로하신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24-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80에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지냈고 또한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눅 3:2-4).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메시지를 듣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하고 갔는가? 예수님은 지금 이것에 대하여 지적하고자 하신다. 세례 요한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언한 강력한 선포였다. 이런 점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더냐고 예수님은 물으신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보러 나갔는가? 요한의 모습에 대해서 누가의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마태복음 3:4에 보면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에게서 무엇인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광야로 나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요한의 모습은 전혀 상상 밖이었다. 오히려 요한은 왕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며 연락하는 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요한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메시야에 대하여 증거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권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누리며 권력을 가지고 로마 정부에 항거하여 이스라엘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권세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의 상황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예수님은 밝히신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시고 또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여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한 선지자였다. 아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다(26절). 왜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이유를 27절에서 밝히신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즉 예수님 바로 앞에서 길을 예비한 선지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다. 즉 인간 중에서 요한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28절).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직접 간접으로 목격하고 경험하였지만 이는 다 표적에 불과한 것들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실현되고 드러날 메시야 나라의 영광과 능력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보다 크다는 말이 요한보다 우리가 더 위대하다는 차원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 안에 거한다면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없이 누구나 다 크다는 의미이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29-30절). 요한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선포되었을 때에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당시의 모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메시야의 나라를 받아 들였다는 말이 아니라 백성들이나 세리와 같은 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말씀을 안다고 자부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은 오히려 옛 틀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 실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천국을 거부하는 죄인의 심성을 폭로하시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31-32절).
장터에서 아이들이 놀 때에 한 부류가 피리를 불면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같이 동조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놀이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잔치 놀이를 싫어한다면 놀이를 바꿔서 장례식 놀이를 하기 위하여 애곡을 해도 옆에서 같이 울면서 그 놀이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요한이나 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죄인들의 불신앙적 상태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의 옛 틀을 고수하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메시야로 말미암아 선포된 하나님 나라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였다(33-34절). 요한도 자신들의 기대에 합당하지 않고 예수님도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당시의 세대는 자신의 요구와 기대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자신이 요구하는 것과 맞지 않다면 불평하는 세대라는 말씀이다.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의 옛 틀을 가지고 스스로 의인인체 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특히 솔로몬이 그렇게 노래하였던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던 것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결국 그것은 모든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이다. 다시 말해서 참 지혜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 지혜로 천국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지혜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천국을 거부하고 주님을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고발하고 계신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35절)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1:19에 보면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이신 예수님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이다. 따라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속의 죽음을 행하시는 것이 행한 일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되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누가복음 본문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비록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메시야를 거부할지라도 온전한 지혜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녀들을 기필코 만들어 나가실 것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것이 인정되어진다는 것이다. 율법의 옛 틀을 고수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의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자기 의를 반드시 드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 인간의 어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십자가로 선포되었고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생명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죄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로 이루신 말씀의 성취를 믿는 것으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된 은혜를 입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선포에 의해 드러나고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의해 선포되고 온전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주님의 일에 우리는 나의 기대와 요구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다면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은혜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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