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20.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불편한 진리 2014. 12. 1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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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잘남을 내세우는 모습이 아니고 철저히 십자가의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드러내는 모습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수긍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는 없다. 죄를 사회적인 기준과 인간 관계의 기준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죄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활동함에 있어서 법에 저촉되는 일이 없다면 죄인이라고 여기는 자는 없다. 자신의 양심과 가려진 위선 속에서의 죄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적인 것까지 아시는 분이기에 성경 말씀을 통해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6장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우리에게 어떻게 어떻게 행동하면서 살라는 행동 지침이 아니라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었다. 죄인에게서는 죄의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기에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결코 의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구주로 오셨다. 이것이 평지설교의 요지이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시고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의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 대신 주님이 친히 이렇게 이루실 것임을 믿는 자가 성도이다. 주님의 말씀은 허풍이 아니다. 반드시 이렇게 십자가로 이루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다시 이적을 보여주시며 말씀의 능력을 보이시는 것이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는 것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게 되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평지설교를 하신 것과 연결된 의도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2)라고 말씀하고 있다. 백부장이란 100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의 장교를 일컫는 말이다. 누가는 백부장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5).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회당을 지어주는 열성을 보여주었다. 그가 유대 민족을 사랑한 것은 단순히 어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 인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독특한 관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의식하고 있었기에 각별한 관심과 애착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백부장은 유대교 신봉자였다. 그러한 그가 자기 종이 병들었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종의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백부장은 종의 병 낫기를 구하되 예수님이 직접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말씀만 하시기를 구하였다. 3절에 보면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몇을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6절에 보면 벗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처음에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종의 병 낫기를 구하였는데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백부장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다시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게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 이것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백부장이 종의 병 낫기를 구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질병을 치유하는 목적으로 구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은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9).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유대교의 회당을 지어줄 만큼 유대교의 신봉자였다는 점에서 보자면 아직 구약의 율법이라는 옛 틀에 매여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약에서 언약하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아마도 예수님께 적용하여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믿고 있었지만 그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이런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즉 율법을 고수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율법 그 자체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말씀을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만나보기 힘들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계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그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율법이라는 옛 틀에 매여서 그 율법을 자기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부장이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으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는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자가 되신다는 것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구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의 능력대로 언제 어디서든지 이루실 수 있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로 부르고 있다(6,7).

 

일반적으로 라는 호칭을 쓸 때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원이다. 특히나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고, 유대인들에게 회당을 지어줄 만큼 유대교에 대해서 아는 자이다. 그렇다면 그는 구약의 말씀들을 아는 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라고 불렀을 때에 그 의미는 단순히 자기보다 신분이 높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백부장은 예수님께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고백은 의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 때에 나올 수 있는 고백이고 말씀의 능력 앞에 굴복 될 때에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런 점에서 백부장의 믿음은 단순히 구약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스스로 생겨난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이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백부장에서 주어진 믿음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셨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이다.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하신 후에 다시 이적을 보여주신 것은 말씀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말씀이란 단순히 공중에 선포되고 흩어지는 공허한 소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은 곧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말과 행동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과 행동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평지설교를 통해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신 주님은 친히 그 말씀대로 자신이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구하는 일련의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연히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평지설교를 말씀하신 후에 의도적으로 그 말씀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방인인 백부장을 사용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본문을 이해할 때에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드러내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 하셨으므로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드러내신 것은 한 마디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옛 틀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고 언약의 성취자로 오셔서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된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의롭게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현대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도 새로운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옛 틀에 매여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된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죄인 됨을 알게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