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
누가복음 8:1-15
씨뿌리는 비유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으로 인하여 그의 집에서 갔으나 사건은 시몬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인 한 여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과 죄인으로 취급된 여자가 예수님을 대접한 것은 대조적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기존의 이스라엘의 본질을 드러내심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사역의 한 전환점을 표시하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비유에 대한 말씀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결과에 대하여 간단한 언급을 누가는 하고 있다. 1-3절에서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 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적들을 체험한 많은 여자들이 이적 자체에 매여 있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자들을 누가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 과부, 죄인들과 더불어 사회에서 냉대 받고 소외당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은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3절에 보면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표현만 끄집어내서 헌금을 강조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열두 제자들, 즉 새로운 이스라엘을 섬겼던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 나라 그것이 그들이 보았던 새로운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 땅의 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평안으로 살게 된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초점을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4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비유란 단순히 어떤 것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다. 모순되는 듯 하지만 또 한 가지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기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점검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기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무시한 시몬의 행동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고 오히려 새로운 이스라엘인 자기 백성들에게는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이미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비유의 결론을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고 내리셨다. 즉 기존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드러난 새로운 나라에 동조하지 않고 거부할지라도 예수님은 자기 자녀들을 만들어 나가실 것이고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 증거 되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이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 씨 뿌리는 비유는 모든 비유의 핵심이요 해석의 근간이 된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4:13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고로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의도에 비추어서 모든 비유가 이해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복잡한 것 같지만 간단하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게 되었을 때에 그 씨가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바위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앞의 세 경우는 결실을 하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땅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결실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 비유를 설교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초점을 땅에다 두고 땅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설교자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여도 받아들이는 자들이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실을 하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좋은 땅이 되도록 기도하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이런 해석은 본문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뜻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좋은 땅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이 비유에 대하여 물었을 때 예수님은 먼저 이 말씀을 하셨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0절).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 이렇게 둘로 갈라놓고 계신다.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양하게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결국 한가지 모습이다. 즉 결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실하지 못하는 모습이 다양하게 많이 나타나서 전혀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좋은 땅에 떨어진 씨로 말미암아 반드시 결실은 있게 된다는 것이다.
11절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씨를 뿌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씨를 뿌리는 자가 누구인가? 그는 다름 아닌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이 씨를 뿌리는 자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셨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일련의 비유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마 13:37)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단순히 전도하시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전도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이다. 현재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도 그러하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세워질 때에 이러한 결과, 즉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결실을 맺고 그렇지 않는 땅에 뿌려진 씨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현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이적들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고, 비유는 이스라엘이 아닌 자와 참 이스라엘을 갈라내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로 오셔서 기존의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로 갈라놓듯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아닌 자와 참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될 것이다. 참 이스라엘로 허락 된 자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깨달아지게 된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셨다. 그리고 또한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인 됨을 철저히 고발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결코 나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영생을 얻게 되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주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여 거부한 현장이 십자가이고, 하나님을 죽였노라고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대속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으로 믿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허락된 자에게만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 본 대로 본문은 좋은 땅이 되어 목사의 설교를 제대로 잘 듣고 이해하여 목사를 대적하지 말자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씨 뿌리는 사역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씀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에게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들을 귀가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에 의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날도 주의 영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만들고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전도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함으로 주의 영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설득하여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자기 자녀로 만들어 놓으신 것을 우리가 전도로 확인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이스라엘이 아닌 자와 참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분해 내시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4.7).
'●──── 신약강론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6.누가복음 8:26-39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 (0) | 2014.12.16 |
---|---|
25.누가복음 8:16-25 바다를 잔잔케 하심 (0) | 2014.12.15 |
23.누가복음 7:36-50 죄사함의 은혜 (0) | 2014.12.15 |
22.누가복음 7:24-35 요한과 예수님 (0) | 2014.12.15 |
21.누가복음 7:11-2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0) | 2014.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