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21.누가복음 7:11-2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불편한 진리 2014. 12. 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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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1-2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11절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 의도적으로 자신이 뜻하신 바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나인 성으로 가시게 된다는 것을 암시 받는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인데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들고 도구와 소품들을 친히 챙기시고 갖추도록 하셔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나인이란 성읍에 가까이 당도하였을 때에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된다. 본문에서 죽음을 당한 집안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2). 죽은 자는 과부의 독자라고 하였다. 이 청년의 죽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과부인 어미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성의 많은 사람이 함께 장례 행렬을 따랐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마을의 사람들도 젊은 아들의 죽음에 많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3).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14-15). 예수님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 모두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고 하는 명령이 가능한가? 죽은 자에게 명령을 한다고 해서 그 명령이 수행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누가가 기록한 이 사건은 지금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5:38)는 말씀의 문맥 속에 있다. 6장에서 예수님은 평지설교를 하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친히 평지설교를 통해 말씀하신 것들을 성취하시겠다는 의도로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은 단순히 과부의 살 길이 막막하여 불쌍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하셔서 그의 독자를 살려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죽은 자에게 명령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셨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말씀을 아무리 듣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죽은 상태라는 말이다(2:1). 율법을 제대로 행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에서 주어진 율법은 죽은 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죽은 자에게 아무리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한들 그것을 온전히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셔서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고발하셨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죽은 자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나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이런 면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의 능력은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이란 이렇게 죽은 상태에서 그 말씀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살아난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평지설교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단순히 허공에 메아리치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남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을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말씀의 능력은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그 의도를 분명히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하였는지 모르지만 장례식에 참여했던 자들이 이렇게 고백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구약에서 활동한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가 온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왕상 17:17 이하)이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왕하 4:17 이하)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선지자의 사역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명기 18:1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 6:14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모세 때에 많은 이적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보면서 모세가 예언하고 있는 그 선지자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돌아보셨다는 표현은 룻기 1:6에서 권고하셨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룻기에서 권고하셨다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님의 이 이적은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이 땅에 방문하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율법이라는 옛 틀로는 죽어 있는 죄인의 상태를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능력의 말씀으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모습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누가는 앞에서 예수님이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사건이나 여기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이나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이방인이나 과부와 같은 이런 자들을 부르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이라는 옛 틀에 붙잡혀 있는 자들을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세상에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과부와 같이 여기는 자들, 이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존재로 있던 자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18-23절에서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가 분명한 지 확인을 시키는 내용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성경학자들은 세례 요한이 의심을 하였다든지 아니면 세례 요한은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확인시킨 것이라는 식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할 때에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도 죄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이 의심을 했다든지 혹은 하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9)라고 여쭙게 하였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2). 예수님의 답변이 무슨 뜻인가?

한 마디로 너희가 보고들은 모든 것, 즉 예수님 자신이 행한 모든 일과 가르친 말씀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이러한 대답은 어쩌면 요한이 질문한 것과는 상관없는 동문서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에 대하여 예언하되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9:18, 42:18 이하 참고). 또 이사야 35:6에서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답변 의도는 옛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앞으로 메시야가 오시면 행하리라고 한 바로 그 일을 내가 지금 행하고 있으므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그 예언대로 예수님이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은 단순히 질병을 치유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생명의 나라와 그 나라의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