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
누가복음 6:20-38
평지 설교(1)
6:17에서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평지란 아마 산 위의 평평한 곳이라 생각된다(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와 내용이 같다고 누가의 이 본문이 산상설교냐 평지설교냐 하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의 관심은 병고치는 것에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이제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본질을 밝히고자 하신다.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나와 많은 사람을 치유하여 온전케함으로써 그 영광을 드러내는 이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열두 사도를 택하시는 것으로 세우기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의 은혜와 능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시는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20-22절)라고 선포하셨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예수님으로 인하여 버림을 당할 때에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가난, 주린 상태, 버림을 당한 상태라는 것은 조금 모자라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가난을 뜻하는 상태를 말한다. 영적으로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표현하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4:18,19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 주린 자를 위해 오셨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깨닫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자라면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슬퍼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 미움을 받고 욕을 먹으며 따돌림 당하고 멸시받는 것이 복인가? 그것은 미움을 받고 욕먹으며 멸시당할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였기에 하늘로부터 오는 상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복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고통과 멸시는 하늘 나라의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롬 8:18).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의 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주린 자로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증거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복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화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4-26절). 천국을 인하여 화를 당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화를 당하는 자들은 모자라는 것이 없는 풍족한 부자들이며 배부른 자들이요 웃고 기뻐하는 자들이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들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화를 당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제(지금) 배부른 자”, “이제(지금) 웃는 자”라고 표현하심으로 현재 육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셨다. 즉 내세에 대한 생각 없이 지금 상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부자요 배부른 자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기준에서 보자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자이며 배부르기 때문에 웃고 지낼지라도 천국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칭송을 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편하게 사는 것으로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27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7-28절). 본문의 평지설교 전체를 보면 도무지 우리가 온전히 행할 수 없는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신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쉽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살 수 없는 죄인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그래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은 우리가 온전히 행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12사도를 세워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시고 그 새로운 나라의 본질을 밝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천국 백성들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 배부른 자가 아니라 주린 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가 아닌 핍박을 받는 자,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런 모습이라는 뜻이다.
죄인이 이런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 매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 즉 희년이 되셔서 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안식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셔서 친히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인 죄인들을 사랑하시겠다는 것이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29-31절). 누가 이렇게 살았나? 예수님 외에 이렇게 산 자가 없다. 예수님만이 이렇게 사셨다. 그것이 곧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32-34절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자기에게 선하게 대하는 자들에게 선하게 대하며, 받기를 바라고 빌려주는 그런 것은 죄인들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죄인과 의인을 비교함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으로서 이렇게 행하실 것임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35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증명되어진다는 의미이다. 누군가 이 말씀대로 사는 자가 있다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신 것을 통해 아들이심이 증명되었다.
37절에서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비판하지 말라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원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의미이다(롬 12:19).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분의 삶이 말씀대로 사는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풍족하며 부유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상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모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새로운 나라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모습은 복에 복을 더하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는 반대의 모습이다. 가난한 자로 살려고 하기보다 부자로써 살려고 하고 원수를 사랑하기보다 원수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철저히 짓밟으려고 하는 모습이며, 함부로 판단하여 자기가 심판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이 땅의 모습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사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요 사랑인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행하실 의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새로운 율법을 제시한 것처럼 생각하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루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님 안에서 이러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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