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
누가복음 6:1-19
새로운 이스라엘
본문의 상황은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었는데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게 된 상황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손으로 잘라 비벼서 먹은 행동은 율법과 그 율법의 세부 조항에 의하면 굶주림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 명백히 추수를 하여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2절)라고 비난한다.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사람들이 철저하게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세세한 규정들을 연구하고 만들었다(막 7:3에 나오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도 이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본문을 이해할 때에 여기서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고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우연히 이러한 상황이 벌어져서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연출하게 하셔서 안식일을 통해 5:34-39에서 말씀하셨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이르렀기 때문에 율법으로 생각하는 옛 틀이 깨어져야 함을 안식일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3-5절). 예수님은 구약의 다윗에 대한 사건을 예로 드셨다. 예수님이 다윗의 사건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예외적인 사건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에 성막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게 된 것은 율법의 본질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막이란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 곳이다. 곧 거기서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막에서 다윗이 잠간의 배고픔을 해결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결코 성막 전체의 본질과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막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느냐를 묻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다윗 때에 성막 안에서 일어난 일로 말미암아 누구도 거기에 대한 의의를 제기하지 않듯이 실제 하나님의 집이요, 성막(성전)이 되신 예수님께서 아니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이 잠간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안식일의 규례와 본질에서 결코 어긋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요 2:21 참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식에 참여케 하여 영적 안식을 얻게 하시는 분, 진정한 안식을 베푸시는 분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말씀이었다. 더 나아가서 옛 안식일이 바라보고 증거하던 완전한 안식을 실현하신 것이며 따라서 옛 안식일의 규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 은혜의 해(희년)로 오신 예수님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 아래 갇혀 있는 자들을 자유하게 하고 눈먼 자들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누가는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사건을 여기에 연결하여 기록함으로 예수님께서 주의 은혜의 해 성취자로 오신 분이심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자를 공개적으로 고쳐주시는 것이었다. 굳이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셔야 할 급박성이 있었다거나 필요성은 없었다.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 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7절)라고 기록함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가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8절). 예수님은 저희 생각을 아셨기에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고쳐주기로 하셨고 또한 공개적으로 회당의 한 가운데 세우셔서 고쳐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안식일에 하심으로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죄에서 놓임 받게 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안식의 주인에 의해 옛 틀은 깨어지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회당 가운데 세우시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여 기존에 죄인들이 가지고 잘못된 율법적인 사고 방식을 고발하면서 고쳐주신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9-10절).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율법의 말씀에 저촉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친히 생명을 주시고 죄에서 놓임 받게 하는 ‘주의 은혜의 해’가 되시는 분임을 증거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옛 틀에 의해서 누가 죄를 짓는가 짓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의 모습과는 전혀 대조적 이었다.
12,13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때에’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앞의 사건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앞에서 보여주신 것과 연관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요한 열 둘을 택하시기 위하여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빼앗기기 쉽다. 그래서 우리도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기에 앞서서 철야 기도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의미를 말씀하기 위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러한 교훈을 주시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왜 문득 예수님께서 열둘을 택하셔서 사도로 세우시는 것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율법의 옛 틀은 깨고 열두 제자를 세우심으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고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복음에 의해 세워진 것이 교회요 곧 주님의 몸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가 12명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응하는 지위와 역할을 감당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열두 사도는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14-16절)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왜 열두 사도의 일원이 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제자들이 결코 다 가룟 유다보다 나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모두 도망하였다는 것을 볼 때에 성경이 열두 제자를 기록함으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이지 제자들의 위대함이 아니다.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함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지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진정한 이스라엘이시다.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써 그 권위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의 본질을 밝히는 뜻에서 말씀을 주신다.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17절). 이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에 합류된 자이다.
그러나 누가는 병 고침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함으로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 그분으로 만족하기보다 자신들의 병을 고치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죄인의 모습이라고 폭로하고 있다(17-19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나라에 합류된 자로 주인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목사/20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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