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15.사무엘하 13:1-19 암논과 다말

불편한 진리 2014. 11. 24. 19:10

15(2013.4.21)

사무엘하 13:1-19

암논과 다말

 

본문에 대한 오늘날 교회들의 해석은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 12:10-12)라는 이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즉 다윗이 범죄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세상적 시각과 사고방식이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원리와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원리이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는 뜻으로,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인데 그 뜻이 오늘날에는 많이 일반화되어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도 알게 모르게 무심코 이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말과 행동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아침에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면 그날 아침에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또 반대로 뜻하지 않게 많은 수입이 생기게 되면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했더니 그런 일이 생겼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는 것과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의 모든 원인이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오늘날 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인간 편에 원인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에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불순종과 화의 관계와 명령과 형벌의 관계가 오해되고 있기에 하나님이 오해받고 기독교가 왜곡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화가 임하는 것은 맞지만 그 원인이 우리의 행동에 달린 문제는 아니다.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근거된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분 나빠서 재앙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원리를 따르는 행동에 당연히 화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의 말씀을 근거로 다윗이 범죄한 것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경이 왜 이런 내용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을까? 암논처럼 살지 말라고 교훈하기 위해서일까? 우선 단순하게 본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13장 이하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즉 죄를 좇고 죄 아래 있는 현상들이 어떤가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윗 왕에게는 여러 아내를 통해 낳은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암논은 자기 이복 누이동생 다말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 정도가 심해지자 암논의 친구이며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다말을 쉽게 강간하도록 방법을 제시했다. 암논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말을 강간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암논은 다말을 겁탈한 후에 그 자리에서부터 증오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일을 통해 드러난 것은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정에 사로잡혀 그것은 해결하고자 하는 욕심만 가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논은 처음부터 다말을 사모한 것이 아니었고 다말을 아내로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암논의 행동은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평상시에 죄를 의도하고 있었고 죄를 지을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기어코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암논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다말이 한 말 속에서 암시되고 있는데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12-13)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14:1, 53:1).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나라로 하나님과 관계된 나라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암논의 행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었다. 암논의 행동은 단순히 간음죄, 강간죄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한 죄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다윗의 간음죄, 암논의 강간죄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그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중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언약의 왕이라는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 가문의 자식들에게까지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왕을 세우게 될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는 말을 많이 두어서는 안 되고 또한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셨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이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가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유지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왕을 선택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라를 유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것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라로 세우신 것은 당시 애굽이나 블레셋 등 이미 여러 나라들이 있는데 또 다른 하나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중재하는 나라로 세우신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다(19:6).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 세워진 왕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언약의 말씀을 따르고 그 언약을 보여 주는 왕이어야 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스스로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의 가정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다윗 왕의 가정이 그러한데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과연 언약의 나라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된 언약의 나라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다윗의 가문이 자식들의 일로 인하여 위기에 처하고 있다는 것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이 무시하고 있었기에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다윗의 가정, 다윗의 가문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다윗의 집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삼하 7:4-17). 그러므로 사무엘하 7장 이후의 모든 말씀들은(물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자들이(비록 다윗의 아들들일지라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말씀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가고 계시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가고 계셨다. 오히려 다윗이 언약대로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이 땅에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스라엘이 선하게 살았고 말씀대로 행한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언약 덕분이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덕분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기 욕망을 따라 어리석은 자로 살고 싶어 하고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제시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이 원하신 언약을 이루신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길을 단순히 제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강력하게 십자가의 길로 이끌어가고 계신다. 그것이 느껴지는가? 단순히 느낌만 아니라 그것이 말씀 안에서 확인되는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7-18)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