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44.사도행전 28:23-28 복음의 비밀성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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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비밀성

사도행전 28:23-28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느니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푸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주신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인이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직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원인을 자기 쪽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따라 복을 주고 저주를 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입니까? 과연 그분이 하나님 맞습니까? 인간의 행동에 따라 움직여지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의 행동으로 조종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닌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이야기가 막힙니다.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마치 다른 나라 사람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거의 다가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다 같은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만 제각기 다른 예수를 믿으며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아니 얼마든지 다른 예수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의 권세, 즉 마귀의 권세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성이 항상 다른 예수를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어도 괜찮다는 하나님을 믿도록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였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는 마귀의 권세에 매여 항상 그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상징인 에덴이라는 곳은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17이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7-19).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저주 아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죽었을 때 화장(火葬)을 하면 안되고 반드시 땅에 묻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시 흙으로 되돌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상태를 무효로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 전체가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이 한군데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입니다.

창조의 상태를 무효로 돌리면서도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처음 창조를 무효로 돌리시고 여인의 아들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이 땅에 내려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것이 저주의 땅에 들려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복음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비밀입니다. 구원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복음이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결코 공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가고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 여인의 후손을 통한 새로운 창조, 하늘의 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는 우리의 모든 노력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하나님 편에서 무엇을 하셨고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고, 성경말씀을 통해 나타내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2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복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4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구약 선지서의 한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이사야 6:9,10의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를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 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26,27).

이 말씀을 이사야 선지서의 문맥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백성이 다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을 자만 받고 구원받지 못할, 즉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는 철저히 구원받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왜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고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데 그 남은 자는 이스라엘 중에 어떤 자가 아니라 본래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하실 언약의 후손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언약의 후손을 거룩한 씨”(6:1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거룩한 씨만 남긴다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불순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5:17-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그의 지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고전 6:15, 5:30).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하나님께서 곧장 하늘나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살게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것이나 바울 사도를 로마에 보내신 것이나 같은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나타내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성령을 받은 자인가? 혹은 누가 복음을 알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인가를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님 편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됨으로 죄악 된 세상임을 확인하게 되고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이 베풀어지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게 해놓고 선택된 자만 예수가 믿어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로운 하늘의 생명을 결코 값싸게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택하지 않은 자는 구원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성(秘密性)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렇게 나타내셨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자기 백성들에게만 생명이 주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말씀 선포를 하되 가려서 하고 아무나 구원받도록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선포는 항상 어디서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상대방을 설득시켜서 예수 믿도록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한 내가 전하는 것으로 상대방이 예수 믿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미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로 확인하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란, 복음 선포입니다. 저쪽과 이쪽을 분리해 내는 작업입니다. 상대방에게 우리 교회나 목사를 자랑해서 데리고 나와 예배당을 채우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말씀만 선포하면 주님께 속한 자와 아닌 자가 구분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까지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갈라내고 분리되게 하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까지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자기 백성인 자와 아닌 자를 골라내시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것이 말씀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25).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시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디모데전서 2:4의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이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4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지만 인간의 죄악 된 상태가 당연히 저주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충분히 우리의 입을 막는 것이 됩니다. 그 은혜에 할 말이 없이 굴복되고 굴복되었기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며 그분의 복음의 선포하면서 살 수밖에 없음이 인정된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