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43.사도행전 28:16-23 이스라엘의 소망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25

43

이스라엘의 소망

사도행전 28:16-23


세상에 지겹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21세기에 19세기 사랑이라는 노랫말에 세상은 너무 지겨워 하지만 너만은 지겹지가 않아라고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연인 사이의 관계가 그토록 날마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지겹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합니다. 결혼의 첫째 조건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으로 서로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결혼하면 지겨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에서 기도할 때에는 항상 결혼을 통해 먼저 모든 인간적인 환상이 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야 예수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연인 간의 사랑이라도 결코 세상에서의 지겨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이 일순간적인 진통제로서의 처방은 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에 대한 대안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1:9). 무슨 일이든지 세상의 일은 반복 속에서 지겨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대하는 것에는 새로움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내 싫증이 나고 지겨움을 느끼는 것이 이 땅의 일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날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도 지겨운 것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하며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화끈하고 새롭고 신선하며 충격적인 것을 교회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선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날마다 듣는 십자가인데도 항상 새롭게 느껴지고 다시 보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모일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의 일생을 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바울 사도를 특별하게 보려고 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의 생애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합니다. 일상적인 한 성도의 삶입니다.

특별하다면 주님께서 바울의 생애를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 외에는 우리가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 주께서 계시하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석달을 거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여의도 광장과 같은 곳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심령대부흥회를 개최한 것도 아니고 병을 고쳐주면서 은사집회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 기도회를 하거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머드 집회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거대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사람을 모으며 기독교를 크게 과시하는 일을 벌이지도 않으면서 로마에까지 그토록 오기를 원했던 바울 사도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아니 로마에까지 오도록 하신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17절에 의하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은 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까지 왔기 때문에 거기서 받는 대접이 융숭했다든지 아니면 가이사를 만날 수 있었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을 지키는 한 군사와 따로 있도록 허락되어서 거기서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간 것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행전의 전체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충격이 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바울을 로마에까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셔 놓고 실제로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거대한 프로젝트 하나도 없이 죄수로서 그대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은 뭔가 주님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바울 사도에 대하여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가게 된 것을 전도 혹은 선교 여행이라는 차원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기쁨과 감사와 순종이 있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는 많은 학문을 한 사람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인정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더구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그가 노년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의 생애는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많은 학문, 이제까지 베풀었던 이적, 하나님을 향한 열심,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주님을 위한 무슨 유익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들의 높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러하므로 너희는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바울이 닦아왔던 학문입니까? 율법에 대한 열심이었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사회적인 지위나 유대인 중의 베냐민 지파라는 가문이나 혈통이었습니까? 만약 그러한 것들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면 계속 율법을 고수하며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가졌던 모든 세상적인 배경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3:8).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바울은 분명 모든 율법의 말씀, 즉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결국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오늘날 교회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입니까? 율법을 가지고 지키며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공입니까? 십자가가 성공입니까? 십자가만 성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성공하셨습니다. 그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신자요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는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소망은 곧 교회의 소망입니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의 소망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주님은 주님 자신의 몸만 남기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몸에 걸맞지 않은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곧 교회의 고백이 되며 또한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매인 바 되어도 괜찮고 자유한바 되어도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불만이 있습니까?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의 순종만 있을 따름입니다.

전도서 3:11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3:11-14).

사람은 본래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세상적인 것으로 잡다하게 채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선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본래 가져야 할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존재로 지극히 평범하게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많은 학문을 하고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바울을 주님께서 어떻게 묶어 놓으셨던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그리고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동기와 목적의 유일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