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42.사도행전 28:1-10 따르는 표적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22

42

따르는 표적

사도행전 28:1-10


신앙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신앙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를 잘하느냐 또는 얼마나 능력 있는 은사를 받았는가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7:15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란 무엇입니까?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 바로 다음 구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신앙의 열매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무조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믿고 행하면 된다고 오해하고 있고 또한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비롯한 모든 신약의 말씀들은 새로운 율법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는 것으로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행하는 많은 권능,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이 모든 것들을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는 무관한 불법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미를 말씀에 근거해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4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뜻을 무시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고 놀라운 능력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생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매란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만들어 내고 나타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적을 나태내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신기한 능력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능력이 되는 것인 줄 믿어진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 사도에 관한 사건은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는데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5)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아무 이적도 바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바울에게 나타난 이런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일행은 파선하여 멜리데 섬에 가까스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석달을 머물게 됩니다(11). 그래서 로마로 가는 것이 그만큼 지체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일들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들은 분명 로마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 멜리데 섬에서 그토록 오래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까? 율리오는 죄수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게 할 의무가 있었는데 왜 로마로 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습니까?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 체류한 것이 로마에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바울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죄수로서 로마에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살인한 자기의 죄에 대한 대가로서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곳 사람들의 상식으로서는 독사에게 물리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멜리데 섬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생각했습니다(6). 그래서 그 섬에서 제일 높은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영접을 받게 되고 바울은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보고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 바울이 이적을 베풀어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 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바울이 가면서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대로 아무 때나 하나님을 시험해도 무방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내가 독을 마시는데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하고 병자에게 안수를 하면 낫게 해 주셔야 한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은 믿는 자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5에 의하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증거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실제적으로 누가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16:20,21).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의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주님께서 챙기실 것입니다. 따르는 표적을 통해 복음을 막는 어떤 방해 요소라도 철저히 제거해 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자가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방해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려도 전혀 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다에서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이적을 보이시고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하셔서 그들이 로마에까지 가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게 하셨습니다. 결코 바다의 풍랑이나 세상의 어떤 조건이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주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에게서 이런 능력이 나타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악함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바울을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인간들은 전부 자기중심에서 바울을 죄수로 끌고 가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만 주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증거 하시는 주님 자신의 일을 중심으로 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 사도와 같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입장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한 죄수를 로마에까지 호송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로마에까지 증거 하시는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에 주님은 바울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런 계시적 의미로 이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신의 복음을 위해서 믿는 자들을 이렇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호하신다는 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아 무슨 능력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복음 때문에 우리를 이런 형편에 두실 수도 있고, 저런 형편에 두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계시적 차원에서 주어지는 사건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까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에게서 나타난 표적들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주님께서 로마로 가는 여정을 어렵게 하시지를 말지 왜 이렇게 배가 파선하게 하고 독사에 물리게 하시며 멜리데 섬에서 오래도록 지체하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보여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열매를 내게서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이 주어진 것으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무자비하신 사랑이 죄를 이기는 것이 됨을 말씀 안에서 확인합시다. 오늘날 우리에게 따르는 표적이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일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못 이겨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