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중심을 보시는 주님
사도행전 10:34-48
교회의 부흥을 말할 때에 대부분은 교인 수가 많은 것, 예배당을 크고 웅장하게 지은 것, 세계 선교를 많이 하는 것, 기도나 성경 공부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많은 것 등으로 말합니다. 그와 동일하게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도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 열심이 있고 윤리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된 것 같으면 신앙이 성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부흥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박국 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대부분 이 말씀을 교회의 양적인 부흥을 이루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교회들의 주보마다 이 말씀을 표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상황을 본다면 통탄할 노릇입니다. 본래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악이 득세하며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를 공격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때 얻은 결론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이 득세하는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이 와서 멸망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기를 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을 부흥으로 보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대로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을 표어로 내 건다면, 우리 교회는 속히 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비뚤어진 성경 해석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그저 좋은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우리 생각으로, 내 방식대로의 기독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것을 가지고 평가할 게 아니라 성경에서 평가하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내 쪽에서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베드로 설교의 시작이 의미 있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절).
물론 이 말씀도 누구든지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아서 구원을 행하신다는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는 데에 있습니다.
전에 베드로 자신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구분하며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은 외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치중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넬료에게 관심 가지신 주님에 대해서 깨닫고 보니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늘 외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외모를 보는 것이 인간입니다. 속 중심을 볼 수 있는 자라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 때문에 베드로는 이제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은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38절). 병 고치심에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마귀의 다스림 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어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행위에 의해서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외적인 기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마귀의 권세를 파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폭로합니다. 이방인에게 더구나 고넬료는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나라의 군대 장교입니다.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의 어리석음과 수치스러운 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뇌리 속에는 이제 유대 나라가 자기 민족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시기에 율법으로 외적을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유대인들이든 아니면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식으로 말씀하면서 고넬료의 가정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주님의 이런 의도 때문에 고넬료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4-46절).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신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주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증인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증인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도 과감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까지 주님의 의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백성들을 증인으로 쓰실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일하십니다.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것으로 결코 첨가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신다는 데 대하여 의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외모를 보는 우리는 중심을 보시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에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7절)라고 하면서 세례를 준 것입니다. 세례를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정하신 일을 베드로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뜻에서 세례를 준 것입니다.
우리 속에 그의 법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렘 31:7, 겔 36:26-27)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신자란 그분의 법을 외적으로 지킨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갈 6:2)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갈라디아서의 문맥에서 볼 때 성령께서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합니다(갈 5:24).
그러므로 최고의 율법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귀한 자나 천한 자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배운 자나 못배운 자의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의 죄인 됨과 주님의 의만 보일 뿐입니다.
천국은 자기의 잘남을 주장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못남을 이야기하면서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 왔음을 고백하고 어린 양되신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나라입니다. 천국을 보여주어야 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천국의 모습을 앞당겨서 보여줄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면을 보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외형적인 것을 갖추었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한국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모아놓고 양적인 부흥을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전라도, 경상도파가 생겼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전도회, 권사회, 집사회 등으로 나누어져 당파를 형성하고 조직을 구성해 직분을 나눠 먹기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마음 맞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런 모임이 왜 있어야 합니까?
교회는 우리의 기호에 맞는 모임으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효율적인 일을 위해 여러 기관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는 일을 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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