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9.사도행전 12:1-19 교회의 기도

불편한 진리 2014. 9. 24. 17:33

19

교회의 기도

사도행전 12:1-19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증을 보면 어떤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 가진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한 개인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내 자녀를 하나님의 힘으로 진학되게 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진학하지 못하게 되는 피해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월드컵 축구가 한창 진행 중인데 한국의 축구가 상대팀을 누르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상대팀은 패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내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중심의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내 중심의 성령은 귀신입니다. 우리라고 하는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맺어진 공동체를 위해 일하시는 신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사탄적 신입니다.

성경에서 밝혀주고 있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입니다. 그러기에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란 바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한 개인이 이적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야고보나 베드로가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헤롯왕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했습니다(1,2). 야고보는 헤롯 왕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하지만 그 다음 장면을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를 구출합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감옥에서 베드로를 구출할 것 같으면 감옥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실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감옥에까지 가지 않도록 하셔야 되었던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야고보는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옥에서 구출해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의 입장과 기호에 맞는 다른 예수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욕심을 이루어주는 성경해석학으로 바뀌었습니다. 액땜을 해주기 위해 푸닥거리하는 무당으로 목사의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이적, 자기 손에 쥐어진 결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죽임을 당한 야고보 쪽이 낫습니까? 아니면 살려둠을 당한 베드로 쪽이 낫습니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베드로 쪽이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은혜스럽게(?) 가르치고 있는 쪽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그런 이적적 경험을 가진 자가 존경스러운 교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은 쪽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0,21).

바울 사도는 살고 죽는 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드러나고 그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그 순간부터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느냐 주님 밖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이나 베드로가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은 어느 쪽이 유익하고 좋은가 하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주님의 일입니다.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야고보가 죽도록 허락하신 것도 주님의 일이요,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여 주시는 것도 주님의 일입니다.

야고보를 죽이시는 주님은 또한 베드로를 구출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야고보에게 헤롯의 칼을 용납하시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사를 보내셔서라도 옥에서 놓임을 받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천사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뜻이 있으시다면 옥에서 구출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이 주님의 일에 베드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6절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에 살아나가기를 위해서 철야기도를 했다든지 금식을 했다든지 하는 그런 대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체념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담담한 일상적인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지극히 수동적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도록 베드로 쪽에서 분위기를 조성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7,8).

베드로는 곧장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왔을 때에 교회는 놀랐습니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데라고 하는 계집아이가 베드로가 왔음을 확인하고 대문 밖에 섰더라고 전하니까 사람들은 그 아이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참말이라고 강조하니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합니다(15).

도무지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지만(5) 결코 베드로가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베드로가 자기들의 기도에 의한 응답으로 오리라고 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교회의 기도 응답으로 풀려 날 수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일하신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옥에서 구출되어야 했다면 야고보는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이유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더 귀했고 야고보는 귀하지 않았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맡겨진 역할일 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내가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일하심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결과는 2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실 뿐입니다. 그 약속을 말씀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흥왕하여지는 그 일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한 개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동원되어질 뿐입니다. 말씀 성취에 있어서 죽는 역할일 수도 있고 죽음에서 건짐 받는 역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지 주님의 일하심에 감사하는 것이 교회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기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야기도나 금식기도, 소위 말하는 릴레이식 기도가 있어야 교회다운 교회라는 말도 아닙니다. 교회다운 교회란, 얼마나 참신한 교회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개혁하고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란, 주님의 일하심에 맡겨진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간 누구를 의지할 수 없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부자, 지식인, 재주꾼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홀로 하신 일이라면 죄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폐기처분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는 것도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신 일이 바로 십자가임을 믿습니까? 그것을 믿는 자들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오직 주님의 일하심에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까지도 주님께 다시 돌려 드리는 자가 진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큰 일을 맡기셨다고 떠벌릴 일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일하신 결과까지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 다시 반납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10-11). 지금 이런 모습을 가진 모임이 교회입니다. 지금 이런 고백을 드리는 것이 교회의 기도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