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24.출애굽기 24:1-40 모세 언약

불편한 진리 2014. 9. 2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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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4:1-40

모세 언약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이것을 소위 모세 언약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셨다. 율법으로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올 수 있고, 반대로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약을 지키는 것이 조건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행위 언약이 되고마는 것이다.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인간의 행위가 관건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이 상실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그러나 모세 언약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조건으로 걸린 행위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 언약이다. 그러기에 언약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시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시내 산까지 인도하셨고, 마침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십계명과 구체적인 율례를 통해서 밝히셨다. 전에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이 나그네였고 가난한 자였고, 과부와 같고 고아와 같은 자들이었는데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나안 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를 날마다 확인하는 작업이 율법의 말씀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다. 때문에 모세 언약을 맺는 이 상황에서 율법이 선포되어진 것이다.

이에 백성들은 한 소리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3)라고 응답하였다. 모세는 소를 제물로 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난 뒤에 그 피를 양푼에 담아 반은 제단에 뿌리고(6) 반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7)라고 응담하는 백성들 향해 뿌리면서 이것이 언약의 피라고 선언하면서 이 모든 말씀으로 인해 언약이 이스라엘과 세워졌다고 한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여호와께 드리는 헌신의 표가 된다. 모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드린 것을 볼 때 이 제사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헌신의 표로 볼 수 있다. 제물의 피를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 이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너희들은 죽는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언약에 응답한 이스라엘은 목숨을 걸고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이 지킬 수 있을까?

언약의 피란 헌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양쪽을 화목케 한 소의 피를 두고 말한다면 그 소의 피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돌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모세 언약은 지금까지 말씀한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언약이다. 이 모세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까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수시로 언약을 주신 적이 있으시다. 그 언약이란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이다. 이 언약들은 결코 서로 다른 내용의 언약으로 시대마다 달리 독특하게 주어진 끊어진 언약이 아니다. 모세 언약은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언약이다.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다(8:20-22). 그 약속은 곧 인간의 제사를 보시고 그것 때문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포기하셨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그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하시지 않았다(8:21). 그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다른 희생이 들어 있었다. 즉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것까지 건짐을 받는 그런 구원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시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이 짐승을 쪼개 놓았을 때에 하나님만이 불로써 그 가운데로 지나가셨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로 홀로 이루실 언약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주셨던 것이다. 할례란 남자 성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이다. 남자 성기의 표피를 자른다는 것은 이제 아브라함 이후의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생식활동을 통해 후손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을 자르고 거부한 상태라야만 가능한 것임을 나타낸다.

노아 언약에서 왜 정결한 것이어야 했는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비로소 여기 모세 언약에 와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죄 없는 정결한 하나님 자신의 희생, 피흘림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 자신이 친히 성취하심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 언약을 통해서 인간은 왜 안 되는가 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땅을 계속 유지시키시는 노아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개별적으로 각각 끊어진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일관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약속의 언약이다.

이제 이 언약 안에 있는 자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복의 근원에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 안에 있는 자가 드리는 희생의 제사에 의해 하나님의 복과 안식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11절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여기서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약이 완성되기까지 현재로서는 잠깐 동안 맛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모세 언약은 단순한 제사의 반복이 아니라 언약의 실체를 기다리는 믿음을 말한다.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늘 율법의 말씀의 의해 어린 양의 희생의 피를 공개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만 잘 믿고 제사만 반복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결코 우리 개인의 번영과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지 죄인들의 편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위해 일하신다.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당연히 언약의 실체되시고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도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 즉 그분이 흘리신 피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방 종교의 의식에는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적이다. 단지 예배 의식에 담긴 인간의 정성과 열심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닌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 자기희생의 피는 무시하면서 지극한 정성과 열심의 예배, 기도, 헌금, 봉사, 전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방 종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앞세우는가 아닌가를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율법을 잘 지키거나 목사를 잘 대접하는 인간의 정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다. 이 피의 언약을 아는 자는 늘 그리스도의 피에 잠긴 자로 살며,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