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20.출애굽기 20:1-26 십계명

불편한 진리 2014. 9. 20. 21:59

20

출애굽기 20:1-26

십계명


1. 출애굽기 20:1-17


제사의 의미는 법궤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에서 극대화 된다. 언약궤라고도 하는 그것은 성막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지성소에 있다.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과 언약궤의 뚜껑(속죄소)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의 관계에서 모세 언약의 핵심이 분명이 드러난다.

여기 20장에서 시작되는 계명의 나열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는데 의미를 둔다. 그 나라는 어린 양의 희생정신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그 희생정신의 질서를 나열한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의 형식은 두 개의 “···하라는 계명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줄줄이 붙어있는 형식이다. 마치 4계명, 5계명이 산의 정상에 있어서 나머지 계명들로 산의 정상으로 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긍정적인 명령 “···하라는 계명은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과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여덟 계명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으로 주어져 있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먼저 “···하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의 서언(序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십계명의 서언에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2)고 했다. 즉 애굽에서 건짐받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들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십계명을 통해 밝혀진다. 그것이 “···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그와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식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명령은 죄악된 애굽과 관련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이 의롭다거나 수효가 많아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7:6-8). 실로 이스라엘은 애굽보다 하나도 나은 것이 없었다. 그들도 애굽과 같이 재앙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그들에 대한 징벌과 재앙을 유보하시고 계명을 주셨다(15:26). 그러므로 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애굽에 내린 징벌과 재앙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7:9-11).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피 흘리는 제사로서의 유월절이 주어졌고, 그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다고 해서 그들의 죄악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잠시 유보된 상태일 뿐이다. 그러기에 출애굽 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어린 양으로 인해 구원받았음을 알아야 하고, 또한 십계명을 통하여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구원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의 애굽 땅에서라든지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속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죄악의 항목에 해당되는 죄로부터 속박되어 있었고 출애굽이란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이었다. 출애굽은 죄악으로 상징된 바로와 애굽이라는 곳에서의 벗어남이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가?

광야가 그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 방향은 십계명 속에 있는 두 개의 “···하라는 계명으로 밝혀진다. 따라서 “···하라는 계명은 이스라엘이 가야 할 낙원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과 관련되어 있다. 즉 죄악된 애굽의 습성을 좇아서 살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또한 그들이 가야 할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삶으로 요구하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도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 명

계명의 내용

명령의 형식

관련된 땅

1 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부정적 명령

애굽 땅

(죄악된 세상)

2 계명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3 계명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긍정적 명령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

5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계명

살인하지 말라.

부정적 명령

 

애굽 땅

(죄악된 세상)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8 계명

도적질 하지 말라.

9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0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5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속죄하셨다는 구속에 근거한다(20:1-2).

이 구속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자로서 증거해 줄 자는 부모이다(12:26-27, 13:14). 따라서 부모들은 이 구속에 근거해서 계명들을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이때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같이 보인다.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는 것이고, 부모는 자녀들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하나님의 계명들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가정에서의 부모들은 자녀(후손)에게 계명들을 가르쳐서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가? 애굽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면 그들이 인도되어야 할 곳 역시 지리적인 장소이거나 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4계명에서 밝혀주고 있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란 하나님만이 일하신 하나님 노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안식이요,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으로 주어진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통치하는 나라, 즉 진정한 안식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구원을 직접 이루셨기 때문에 주실 수 있는 계명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은 인간 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근거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에 의해 우리를 선택하시고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영원한 안식인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그의 언약 때문이며, 하나님 그분이 전적으로 행하신 구원 사역의 결과이기에 계명의 삶을 요구하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소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누가 가르치는가? 다시 말해서 십계명에서 말하는 부모의 역할을 누가 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영원한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고 가르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십계명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모란 단순히 혈육적인 관계에 있는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깨닫고 가르치는 교회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시고 구속 역사를 이루신 계명이기에 십계명의 정신은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22:37-40).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과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신 것이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율법이 완성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13:8-10).

십계명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십계명의 해석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교훈적인 해석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첫 번째 계명(3) -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애굽의 신들을 쳤던 여호와이시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신 이외에는 신이 아니다. 그 여호와로 이스라엘에게 독특하게 계시된 신만이 참 신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면 애굽의 신들을 치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바로 유월절을 통해 어린 양의 희생을 보이신 분이다. 자기희생이 없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정신을 구현하면서 살게 되듯이 오늘날 새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하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계명(4-6) - 이 계명은 우상을 만들고 또한 섬기는 것을 금하는 단순한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모든 피조물과는 철저히 구별되시는 분이시기에 피조세계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참 신은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마음대로 고안해 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두 번째 계명의 초두에 너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붙어 있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위해 하는 모든 종교행위 자체가 우상이다. 심지어 자기를 위한 하나님, 자기 자신을 위한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믿는다면 그것 자체가 우상이다.

세 번째 계명(7) -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답게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이방 종교인들)이 주술적인 도구로 부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서는 안 된다. 애굽인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불렀던 것같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번성과 미래의 보장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애굽의 신과 다를 바가 없다. 언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과는 무관하신 분이다.

이름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기능과 성품을 특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지상에 드러나야만 한다. 그 이름은 언약의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지상에 공개 되었다. 그렇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구원이 된다(4:12).

네 번째 계명(8-11) -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씀에 의해 유지되는 그 상태가 안식의 상태이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안식의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때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안식의 상태가 깨어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 안으로 부르셔서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다.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깨어진 안식의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날만큼은 인간의 노동은 철저히 중단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일하신 궁극적 결과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만물을 회복하시고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안식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말씀은 안식일이라는 날이 거룩하고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고백적인 차원이다.

다섯 번째 계명(12) - 오늘날 교회에서 이 다섯 번째 계명을 근거로 부모에 대한 효를 가르치면서 그에 따른 장수(長壽)의 축복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도 아니고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단순히 부모에 대한 효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과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손 대대로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하셨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애굽에서 탈출한 세대만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전달되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계시(언약)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부모가 담당하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여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공경이 되는 것이다.

여섯 번째 계명(13) -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권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아니다. 애굽에서 건져낸 모든 생명은 구원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라는 선언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인한 피의 대가를 치른 생명을 해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훼손하는 생명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으면서부터 깨달아야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로 인해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일곱 번째 계명(14) - 간음이란 남자와 여자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관계에 끼어드는 문제이다.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다. 이 질서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끼어들게 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질서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대로 자리 잡게 됨으로 하나님과 언약 백성들 간의 관계가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여덟 번째 계명(15) -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그네였고, 자신의 소유권이 있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애굽을 탈출할 때에 많은 재물을 애굽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한 측면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편,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기에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남의 소유물에 대하여 침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아홉 번째 계명(16) - 함께 구원받은 이웃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유월절 희생을 보여주어야 한다. 즉 어린 양의 희생정신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재판 등의 과정에서 거짓 증거를 행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이웃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국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출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한 몸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몸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열 번째 계명(17) - 이웃의 소유를 탐낸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이웃과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에게 있는 것은 지키고, 상대방의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란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이러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따라서 언약의 백성이란 탐욕이 동기가 되어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희생정신으로 이웃을 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첫째나 둘째나 서로 같다는 의미에서 하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22:37-40).

2. 출애굽기 20:18-26

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인 계명들은 진노의 말씀이었다. 그 계명들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은 죄인을 죽이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임재에 비추어 볼 때에 자신들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죄인들임을 철저히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 앞에서 이스라엘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모세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세의 중보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1).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직접 보여주심으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을 만들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다(23).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었던 이유는, 계명으로 주신 진노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죽이지 않고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그 의미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제사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제단이라는 것 자체를 우상화할 가능성은 죄인들에게는 항상 있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제사제도 자체가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여기서 밝히신다.

모세 언약에 있어서 복의 강림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데 있다(2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이름이 필요 없는 분이다.

그런데 이름을 가지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두시겠다는 것은 인간들을 찾아오신다는 뜻이다. 피조 세계에 들어오시기 위하여 이름을 가지는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을 자신이 친히 정하시고 그곳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12:5,11,14,18, 14:23-25, 16:2 ).

열왕기상 8:16에 의하면 그곳이 성전이 된다. 성전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으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을 통해서만 복이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굴복된 자에게 영생의 복이 주어지는 것이다(4:12, 2:9-10).

따라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제사제도는 단순히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복을 획득하던 이방종교의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제단을 만들되 다듬은 돌로 해서도 안 되고 거기에서 하체가 드러나서도 안 된다. 이방인들은 신전을 우상화하며 성적인 행위를 통해 제사의식을 치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제사의식은 결코 그러한 모습을 갖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복을 받아내는 데에는 어떤 기술적인 것이 요구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것으로 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유월절 언약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었다. 유월절 희생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십계명 다음에 이렇게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제사가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율례를 주셔서 그것을 지켜 행하도록 말씀하셨다.

만약 이러한 율례를 지키지 않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서 복과는 상관이 없이 오직 죽음만이 찾아들 뿐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계명대로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그냥 넘어가 달라는 그런 식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이 말씀대로 살겠다는 이스라엘 쪽에서의 헌신의 표시이며 언약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24:5-7).

오늘날 사람들은 복을 원하고 있지만 진정한 복의 의미를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복을 찾고 있다. 복이란 목사를 통해서 오거나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그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상태가 바로 복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