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출애굽기 19:1-25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출애굽한지 2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한다. 시내 산에 이른 이스라엘은 이방국가와 같은 모습과 체제로 국가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창세기 12:1-3에 언급된 그 복의 근원이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지상에 등장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나라는 세상에 산재해 있는 이방 국가, 나라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약의 나라이다. 그 언약의 나라는 6절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제사장 나라”이다. 이 특이한 나라는 유지되는 방식도 독특하다. 그 방식은 언약이라는 방식이다. 언약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즉 언약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성취를 위해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상태로 몰고 가신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애굽에 정착하였고 4대만에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대로 400여년이 지나 출애굽하였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애굽에 살다가 출애굽하였다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여기서 또 언약을 맺으셔야 하는가?
그것은 국가를 세울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국가 설립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한 그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출애굽하였다고 하나 아직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소유한 나라는 아니었다.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가진 나라로 이스라엘을 만들려고 할 때에 바로라는 이방 왕이 방해하였다. 그 때문에 발생된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언약국가는 철저하게 비애굽적이고, 반애굽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한 유월절을 통해 보여준 어린 양의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었다. 그 아브라함의 언약이 구체화 된 것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거룩 안에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역시 시내 산까지 오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여 주었듯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 안에 거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결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함부로 나갈 수 없는 더러운 존재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죽음이 임할 수박에 없다(12절).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처리가 있어야 한다. 즉 누군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동행하게 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모세 언약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 언약은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인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의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진노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십계명으로 보여 주신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절대적인 말씀의 진노를 덮어주는 희생의 피를 보여 주는 제사제도이다. 그 제사제도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근거가 된다. 그것을 받기 위하여 이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 서게 된다. 즉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끌어가야 한다. 그 거룩의 의미는 희생이 바탕이 된 거룩이다. 이제 이러한 모세 언약의 구체적인 의미가 19장 이하를 통해 차츰 밝혀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전에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불러낸다고 하셨다(출 3:2). 출애굽 할 때에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출 8:1). 그 섬기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언약으로 지켜야 하는 이스라엘이 희생의 피 안에서 화목하게 된다. 그래야만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희생의 피를 흘리는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이 거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말한다.
이스라엘이 진노의 대상이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시내 산에 올 수 있었고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맺는 언약을 통해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보여 주는 제사제도 안에서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의해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그 진노를 십자가가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핵심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십자가의 희생정신, 그 피의 정신으로 행하는 것이 될 때 그것이 거룩이고 여호와의 소유된 백성임을 알아야 한다. 피의 정신, 십자가의 희생정신이란 철저히 애굽과 같은 세상을 거부하고 정죄하는 것과 동반되어진다는 것도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피의 정신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비거룩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이란, 우리가 이 비거룩에서 탈출하여 십자가의 정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출애굽이요 언약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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