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0.사도행전 6:1-7 말씀 전파

불편한 진리 2014. 9. 17. 21:22

10

말씀 전파

사도행전 6:1-7


이 땅에 있는 교회는 항상 세상적인 문제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에 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완벽하고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이 땅에 있는 교회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교회입니다. 문제가 있고 완전하지 못한 그 모습 안에서 참된 주님의 교회를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에게 던지시고 그 가운데서 남은 자를 항상 골라내시고 불러내셔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모임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에 의해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피의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회개가 있어지는 그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는 교회의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편에서는 자신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이제 인간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에게는 주님이 살아 계시고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으로 인해 더욱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5:41,42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이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아 약속의 땅에서 다 쫓겨나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버린다고 하여 이방인들의 문화를 취하고 이방인들과 같은 상태로 되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과는 달리 다니엘과 같이 이방 땅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만을 섬기며 포로에서 회복될 때에 본국으로 돌아온 자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파당이 형성되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헬라파 유대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또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대로 자기 재물을 교회에 헌납한 것을 모아서 일괄적으로 교회에서 나이든 과부들에 대한 생활비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참고 딤전 5:9,10).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구제가 누락되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출애굽 당시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에게 나왔던 것입니다(16:7, 14:27, 고전 10:10).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광야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광야의 상황이기 때문에 물을 먹어야 할 권리가 있고, 편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시마다 때마다 양식을 챙겨 먹어야 할 권리가 있으며, 구제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떤 누구도 받을 권리가 있는 자는 없습니다. 가난, 결핍 모자람 등은 우리에게 있어서 큰 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죄인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대가를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구제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저 주님의 은혜에 의해 베풀어지는 줄 알고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구제할 권리만 있지 받을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나의 희생을 통해 주님의 것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을 받은 자들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일방적으로 한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가 구제한다는 차원은 복음을 전한다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 재정의 일부를 지출하여 물질적으로 보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구제가 아닙니다. 물질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세상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이나 물질입니까? 아니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영생입니까? 당연히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여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삶의 형편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 여기서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를 다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기도가 동원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하는 차원에서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본래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5) 세웠다고 했습니다.

이 일곱 사람을 흔히 일곱 집사라고 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집사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곱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구제에 대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 때에 사도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본 것은 교회가 본질적인 것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에 교회가 전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즉 그분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에 기준을 잡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해서 사도들이 터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한다면 사도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본래 가져야 하는 사명은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는 말씀만을 전하고, 일곱 사람은 재정만 담당하며 교회의 잔무를 처리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을 전무함에 있어서 곁가지처럼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서로가 감당하여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될 때에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여기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다는 말씀은 제사장들이 전부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이 될 때에 어떤 자들도 복음에 굴복되지 못할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지도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땅의 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항상 새롭게 말씀을 전하는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교회는 늘 이런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사도행전 곳곳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9:31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12:24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16: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19:20 말씀도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항상 초점은 말씀이 힘이 있어 그 말씀에 굴복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끝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0-31).

바울이 어떻게 되는가? 또는 교회가 성장 발전했다는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복음, 말씀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취되어 간다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들을 복음에 굴복시켜 나가시는 일만큼은 친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세상의 일로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방해받지 않으십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뜯어고치고 새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말씀을 전하는 본질적인 사명에로 돌아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왕성하게 하는 일에,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신경 쓰고 있습니까? 그 일에만 전념하는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큰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구제가 아니라 말씀 전파였습니다. 전도하자, 선교하자 그러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교회에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이나 세상적인 일에 근심하며 신경 쓰는 교회라면 날마다 버려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행정상의 일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일에 관심가지는 교회라면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일에만 관심 가지고 만족하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