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7.히브리서 13:18-2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32

히브리서 57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13:18-25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변화를 요구합니다. 어떤 한 가지를 계속 반복한다는 것은 지루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가 매주일 성경의 한 책을 계속 연결하여 살펴본다는 것을 매우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이어서 살피면서도 계속 십자가를 이야기했다는 것이 지루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부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의 설교적 테크닉이 말씀에 다가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십자가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새로운 십자가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상고하면서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책망과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위인들의 훌륭한 삶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는 그런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들이 갇혀 있었던 제사 제도, 의식 그것을 초월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제물이 되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것이 날마다 새로운 하늘의 은혜로 생각되게 함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히브리서 성경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마지막 본문을 강론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처음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1-2).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여러 방편으로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습니다.

결국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드러내고자 했던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히브리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히브리서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낱낱이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레위 제사장의 한계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사 제도의 제한성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로 온전히 모든 의를 성취하시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약에서 행해졌던 의식과 제도들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오늘날 우리 신앙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눈에 보이는 의식이라든지 혹은 제도, 절기 등은 우리가 행해야 할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과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히브리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를 바라보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표현들을 많이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믿음이시고 소망이시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아니고서는 우리에게서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를 하자!’ 라든지 예배를 바르게 잘 드리자!’ 라든지 혹은 헌금을 제대로 드리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헛된 데로 돌리려고 하는 죄악 된 마음입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이렇게 하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합니다. 내가 잘되기 위한 기도이고, 나의 삶의 유익을 위한 헌금이며, 내가 천국 가기 위한 헌신이요 예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우상 숭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나 자신이 중심이 된 삶이기에 나오는 종교적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 18,19절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는 말씀도 보면 너무도 쉽게 서로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남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의 대학 입학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또 자기 사업이 잘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 자기가 빨리 낫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왜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위해 남들이 기도해야 합니까?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라치면 자기 욕심을 좇아가는 거기서 넘어져서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차원에서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이것이 전제되어 있는 기도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런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하게 행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선이란 오직 하나님의 행위만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히브리서 기록자를 통해 드러내신 복음을 계속적으로 드러내시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연약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함으로 내게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건 기도의 시작부터 잘못 된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연약한 자가 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함으로 연약한 자가 강한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는 연약한 그대로 있고, 강한 주님은 능력 있는 분으로 그대로 존재하십니다. 다만 기도함으로 능력있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보고 있고 누구를 중심으로 해서 사느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을 드러내는 선한 행위는 주님께서 계속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한 시도 주님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함으로 우리의 연약함, 즉 죄악 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 서신을 받는 자들과 속히 만나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자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0,21)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17절에서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결국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도자란 양의 큰 목자이신 주 예수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또한 기도하며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큰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예수 믿게 만드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 기도로 다른 사람이 변화되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하신 일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의 몫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바로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왜 평강의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피를 흘리신 것이 평화를 이루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선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란 그 선한 일을 드러내도록 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한 일, 곧 십자가의 복음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양의 큰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목자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님이 큰 목자이시고 다른 사람을 작은 목자로 세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목자와도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한다고 할지라도 큰 목자이십니다. 즉 큰 목자 앞에서는 그 누구도 존재 의의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목자란 예수님만이 진정한 목자라는 뜻입니다. 실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진정한 목자라는 것이 온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10:11,12).

실로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4-18).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을 따라 자기 양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영생을 주시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37:24-27).

한 목자를 세우심으로 화평의 언약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평강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선포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자도 새 언약의 중보가 될 수 없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10:29).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기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하였는가? 혹은 헌금을 얼마나 많이 드렸는가? 또는 주일 예배를 얼마나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드렸는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자거나 예배드리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 근거해서 천국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기 뜻이란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우심은 십자가에서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신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선언했습니다(고전 2:2). 또한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6:14).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자신과 또 형제 디모데를 만나기를 원하고 또 함께 가서 만나기를 원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짐으로 선한 일이 온전케 되는 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이고 만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이 일에 부름 받았다고 믿습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기록하였습니다(2:12). 그리고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도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에 의해서 주님께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25절에서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미 히브리서 기록자는 2:9에서 선언한 바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순종하신 그 모습 그대로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성도가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속의 피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죽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