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5.히브리서 13:10-13 영문 밖으로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27

히브리서 55

영문 밖으로

히브리서 13:10-13


저희 주소는 경기도 시흥시 은행동 323-16번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편물을 받아 볼 수 있는 주소이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는 표시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역을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놓은 어떤 부분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 서로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필요한 주소입니다. 내가 죽으면 나에게 있어서 주소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성도는 이 땅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의 어디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는 존재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대하여 죽은 자는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땅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를 두고 성도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 속한 존재로 산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고 그 주인을 위해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청와대에 있다는 것은 청와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와대라고 하는 영역에 있다는 것은 그 주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주인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그 영역에 같이 거하여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늘 점검해 보아야 할 사안입니다.

오늘 본문 10,11절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 아래서 제사장들은 제물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6장에 의하면 대속죄일에 드리는 속죄 제물은 그들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광야로 보내고, 속죄제를 위하여 잡은 수송아지에서 피를 취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립니다. 그리고는 제물의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 밖으로 가져다가 불 사르게 되어 있었습니다(16:27).

말씀에 대한 배경을 구약에서 보았을 때에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대속죄일에 대한 의식입니다. 오직 일 년 중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제단에서 죽인 제물의 피를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 즉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 다시 말해서 레위 반열의 제사장들이 제사 가운데 가장 엄숙한 이 제사의 제물은 먹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에는 제물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완전히 불살라 버리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대속죄일의 의식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속죄일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모든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여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가 완전한 제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상에서 단번에 영구적으로 자기를 드리고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하늘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몇 사람들이 기독교는 제단이 없으므로 유대교보다 못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하고 있는 제단이란 십자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제물을 나눌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2:5에서도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베드로전서 2:9에서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제사장이라고 묘사함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제단에서 제물을 먹을 권이 있다고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제물을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들어서 오늘날 성도들이 제단에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특권과 대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대속죄일에 드려진 속죄 제물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그러한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완전히 불태워졌기 때문에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을 수 있으며 또 먹으라는 명령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먹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6:51).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어떻게 그가 자기 살을 먹게 하겠느냐며 의아해 하였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이것이 엽기 아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마 엽기적인 유머를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엄숙하게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2-55).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사실상 예수님은 6:35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 굶주리지 아니하고 또한 자기를 믿는 자는 누구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 그의 살을 먹는 것이고, 그를 믿는 것이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께 가는 것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1:12, 3:36, 5:40). 따라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자 제물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드리는 삶으로 우리는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확언한 대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5:7). 이는 단순히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의미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찬의 의미는 그분의 살과 피에 동참되어져서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곧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6:57에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레위 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속죄 제물을 먹을 수 없었던 것과 오늘날 우리에게는 제단이 있다고 대조하였던 것에 대한 결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2).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속죄일에 제단에서 도살된 짐승의 시체는 레위기 16장의 말씀에 따라 영문 밖으로 옮겨져 완전히 소각되었습니다. 진 밖에서 불태우는 것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영문 안과 영문 밖의 대조입니다.

레위기 16:26-28에 보면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며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냈던 자나 진 밖에서 제물을 태웠던 자가 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성결 의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진 안의 땅은 거룩하고 진 밖의 땅은 거룩하지 못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성막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며 더불어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땅이기 때문에 거룩한 땅입니다. 땅이 거룩한 땅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또한 그들이 진치고 있는 땅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대로 적용시켜서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죽으신 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문이란 예루살렘 성을 둘러싼 성벽의 문을 의미하여 예루살렘 성은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었던 진영의 거룩한 땅과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 밖의 거룩하지 못한 땅에서 자기 몸을 제사 드렸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땅에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서 제사 드렸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골고다라고 하는 곳이 저주의 땅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22에 의하면 골고다를 번역하면 해골의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라는 저주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개념 속에는 신명기 21:23 말씀 때문에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을 죽었다고 보는 것이 유대인들이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결코 저주 아니라 오히려 그곳이 하나님이 거하신 거룩한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속죄일에 진 밖에서 제물을 태우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성문 밖에서 희생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었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성 안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간들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이 저주의 땅이라고 하는 곳을 친히 피를 흘리심으로 거룩한 땅으로 바꾸셨습니다. 성막이 있다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진을 거룩한 땅으로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저주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자리를 거룩의 자리로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 안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하여 죄가 있는 자를 돌로 칠 때에 성 밖으로 끌어내서 처형하였습니다. 인간들이 거룩한 땅으로 여기고 있는 그 땅을 하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자신을 거룩하지 못한 세상과 동일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죄인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친히 홀로 저주를 다 당하심으로 저주받은 자를 거룩의 자리에 두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홀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그 거룩함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니 골고다라고 하는 저주의 자리, 십자가라고 하는 저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오히려 저주의 자리를 거룩하게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그곳으로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문 밖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13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영문, 즉 성문 안의 세상을 비 거룩으로 단정하고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저주의 자리라고 하는 골고다를 거룩의 자리로 인정하고 그곳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영문 밖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미워하는 사람 때문에 무조건 갈라선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이 거룩과 비 거룩으로 갈라놓기 때문에 나누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4-39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고난을 지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자리이기에 그분과 더불어 세상에서 죽는 것입니다. 제발 십자가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목걸이나 귀걸이로 할 수 있는 장식용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내가 주님과 더불어 죽는 자리임을 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능욕을 진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3:1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스스로 고행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 것을 버리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에만 기쁨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흔히 부활절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면서 오락과 자기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을 절제하면서 고행을 하려고 합니다. 쉽게 할 수 있는 고행이 금식이기에 고난주간이 되면 너도나도 금식을 무슨 행사처럼 하고 있습니다. 의식을 하는 그것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연례적인 의식이나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주님의 고난을 우습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일주일에 하루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한번 드린 것으로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의 십자가 능욕을 지고 주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미 11장에서 믿음을 말씀하고는 12장에서 징계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징계입니다. 나에게 좋으신 하나님만 찾는다는 것은 아직 십자가의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믿음을 아직 받은 적이 없는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제단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참여하게 된 이 엄청난 제사장의 특권만 누리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대로 고난과 죽음이라는 징계가 기쁨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오직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문 안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영문 밖에 속한 자입니다. 영문 밖에 주님을 바라보고 또한 그분을 좇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 내가 가진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날마다 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