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4.히브리서 13:7-9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22

히브리서 54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13:7-9


인간은 모든 일을 다 자기 입장에 두고 생각하고 또한 행동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는 크게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는 것으로 자기 뜻만 성취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성취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서로 충돌이 있기 마련입니다.

서로 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에 우리는 이런 말을 쉽게 자주 합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 인간은 누구다 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면 실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보라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해 달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중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항상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 확대된 것이 사회이고 또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국가간의 교류도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수교라는 것도 맺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국에 이익이 전제되어 있을 때에만 수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라는 단체도 자기 자신의 확대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속해 있는 국가를 세계의 중심의 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바뀝니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바뀌어 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그렇게 사람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9-20).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19절 말씀보다 20절 말씀입니다. 즉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성도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외 여행을 갈 때에도 주님은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늘 주님과 동행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19절 말씀에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지배아래 항상 함께 거하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의 18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상황은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통해 하늘의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셨기에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세상을 하늘의 것으로 하나로 만드셔서 그것을 다스리시는 온전한 권세를 가지시게 된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필요한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늘 함께 하셔서 일해주실 것이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하늘의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까지입니까? 세상 끝 날까지입니다. 즉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끝내는 것도 주님의 권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세상을 끝낼 때까지 자기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자기 뜻대로 이끄셔서 세상을 끝내시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살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마태복음 28장 끝의 이 말씀은 오늘날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도우시고 힘을 주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나의 형편과 처지와는 상관없이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 대로 반드시 주님 자신의 뜻대로 이루신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방식 대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라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세계관도 엄밀하게 따져보면 결국 우리 자신의 세계관에 불과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집단을 통해서 보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세계를 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그러한 심성을 고발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성을 날마다 폭로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믿고 있다고 스스로 믿음 있는 척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 모든 제도들, 모든 나라들을 십자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께서 세상을 끝내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상고할 히브리서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8)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보통 오해를 많이 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앞에서 마태복음의 말씀과 같이 자기 입장에서 이 말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변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나와 함께 하셔서 변함없이 지켜주신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그러한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오늘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친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던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던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불쑥 히브리서 기록자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많이 이해하고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이 말씀을 자기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자기 편의대로 인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에 변하지 않는 그분이 오늘도 늘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점에서 이 말씀은 진리이고 또한 성도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그러한 뜻으로 말씀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히브리서 기록자는 1장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11장에 와서는 그 그리스도께서 믿음이라고 선언하면서, 믿음에 의해 이끌림 받은 구약 시대의 인물들을 나열하였습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림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표현은 어제, 즉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쳤던 지도자들의 믿음의 원천과 주인이 되셨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믿음으로 이끄시고 또한 이제 후로도 영원토록 믿음으로 구약에서 이제까지 이끄셨던 방식대로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구약 시대나 오늘날이나 또 앞으로도 믿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이끄신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일하시는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거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믿음으로 이끄시고 그 믿음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제까지 믿음으로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고 7절에서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당시에 말씀을 가르쳤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폭넓게 믿음으로 살다간 모든 성도들이 그들에게 말씀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던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믿음의 조상들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고 또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으므로 저희 믿음을 본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들을 믿음의 방식대로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주장하셨듯이 오늘날도 그리고 또 영원토록 믿음의 방식대로 동일하게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보여주었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을 좇아 살았던 삶이라고 해서 그들의 믿음을 막무가내로 좇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기록 될 당시에 성도들은 고난과 어려가지 어려운 박해로 인하여 믿음을 계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피곤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살아 계신 주님이 왜 우리를 이 고난과 어려움에서 구해주시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믿음을 가졌다고 하나 세상적인 여러 유혹들에 미혹되는 현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당시의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이란 음식에 관한 교훈이었습니다. 음식에 관한 엄격한 규정들을 세워 놓고 그 규정들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좀 더 신령하게 된다고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에 현혹되어 그것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현혹하는 많은 다른 교훈들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20:30)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게 서신을 보낼 때에도 그들을 책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늘 눈 앞에 보이는데도 불러주신 그분을 좇지 아니하고 그분을 등지고 다른 복음을 따라간 데 대하여 너무도 놀랐다고 하였습니다(1:6-7). 골로새 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포로가 되었던”(2:8)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음식을 먹는 문제로 인하여 말씀을 한 부분은 로마서 14:15-17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이야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음식을 먹는 문제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의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도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굳게 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서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미 9:9,10을 통해 이 부분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레위 제도를 통해 드려지는 예물과 제물이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8장에서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고전 8:8)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히 세우는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뿐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 성도를 세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맛보신 죽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러므로 교회를 미혹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때그때마다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늘 말씀으로 지키셨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에서 드리신 완벽한 제사였고 또한 삼 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음부의 권세를 온전히 깨뜨리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면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주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 된 교회를 친히 지키시고 온전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인도하시되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의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식이란 결코 내가 주님을 믿는 방식으로 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믿음으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그 방식 대로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러한 형편에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미 6절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에 맡겨진 삶입니다. 히브리서 11:1-2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늘의 것을 이 땅에 끌어당겨 와서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원리와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일하시는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내 중심에서 세상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는 자가 하늘의 원리와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좇아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오는 고난과 어려움 그것은 당연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신 예수님이 변함없이 나의 주인이 되어주시기를 원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