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3.히브리서 13:1-6 형제 사랑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21

히브리서 53

형제 사랑

히브리서 13:1-6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몇 주일 히브리서 마지막 장인 13장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은 1절에서부터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마지막 세 장인 11-13장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1장은 믿음에 대해서, 12장은 소망에 대하여, 13장은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22-25에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가지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서 따로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나오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믿음이나 소망이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소망과 사랑이라는 덕목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음행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등등 이런 말씀들을 내가 직접 실천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결코 그런 것으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또한 소망을 굳게 잡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서로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소망을 가지게 하시며 또한 사랑을 베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덕목을 부지런히 실천하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종교적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금식과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결코 구제와 금식과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말씀들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늘 힘든 것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복종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전시용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또한 그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순종 혹은 복종이란, 말씀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이지 내가 생각하고 어떤 윤리적인 덕목을 실천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내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미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주어진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서 드러내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또한 잘 대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받는 만큼 베푼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전혀 상관이 없고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사랑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이해관계에 얽혀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스라엘에 와서 살았던 외국인,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였던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한 다양한 율법의 조항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과 자비와 인애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에 죄인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으로 치부하고 소외되었던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은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는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우하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을 통해 메시야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로 예수님이 그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하고 약자로 소외되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셨던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희생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오만 불손한 종교적, 사회적 잣대에 의해 부당하게 취급되고 평가되었던 버림받은 사람들, 즉 병자, 세리, 창녀, 나그네, 어린 아이들 가운데 오시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셨던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희생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약자로 소외되던 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인간 세계에 사랑이 없다는 선언이었고 또한 하나님만이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고 베푸는 사랑은 전부 가짜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폭로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짜 사랑을 가지고 베풀고 있다는 것이 온전히 다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 사랑이 나왔다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11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한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아들이므로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그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의 아들 됨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만유의 후사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형제 관계라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형제를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것은 사랑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상황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계속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박해 가운데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희생을 치루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심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는 것이 피곤한 상태였기에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과 함께 나누며 산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거부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2,3절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를 들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창세기 18:1 이하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 아래에서 세 사람을 환대하였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돌아올 특별한 이익을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였던 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게 되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그것자체가 복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손님 접대가 천사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거나 혹은 큰 축복을 얻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랑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학대받고 핍박당하는 상대방을 향해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학대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보상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라는 것은 학대받는 자들이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학대받고 있는 자와 같이 그렇게 받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무조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학대받는다고 치부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이 낙심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적 우월감을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형제라고 서로 생각한다면 같이 아픔을 느끼고 같이 기쁨을 느끼는 지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그렇게 명령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체이기에 자신의 연약함을 안다면 또한 상대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어 있고 사랑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사랑을 주려고 하니까 힘이 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가 결혼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성결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 독신 생활을 주장한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 금욕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3 이하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서 바울 사도는 혼인을 금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 다음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여러 가지 박해로 말미암아 가족들이 함께 당하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박해가 주어지니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또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기에 부부관계도 서로의 사랑을 주고 받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인을 귀히 여기며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믿음, 사랑, 거룩이란 결코 세상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4:3-7에 의하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 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신 것은 거룩에로의 부르심이지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사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만족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에로의 부르심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5)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 때문에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하늘의 것을 사랑하고 또한 세상의 것도 사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우리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을 공격하면서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드러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 일도 돈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돈도 많이 벌어야 된다고 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도 돈으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돈을 교회에 많이 내어놓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가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는 일, 즉 입는 것과 먹는 것과 거주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분이 주장하시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십자가의 주님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선언하였습니다(딤전 6:10). 돈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에 핍박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은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돈을 향해 사랑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형제 된 자들에게 사랑이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11,12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되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배고픔과 배부름이라는 세상의 것에 매이거나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6).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