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2.히브리서 12:25-29 진동치 않는 나라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19

히브리서 52

진동치 않는 나라

히브리서 12:25-29


그저께 제가 속해 있는 교단 어떤 목사님의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교단의 중요한 직책들을 많이 맡아서 일한 분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자신이 오랫동안 목회한 교회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원로목사로 여생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교단에서는 존경받는 분이었고 교단을 위해 많은 일을 한 분이었기에 총회장(總會葬)으로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장례식은 약 1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되었습니다. 장례식 내내 거의 고인에 대한 업적과 훌륭함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저의 뇌리에 남는 것이라고는 고인은 교단을 위해 그리고 목회했던 교회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한 사람이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만약 내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고인이 이 땅에서 한 일들이 바르게 하였는가 아닌가 혹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한 것들이 정말 잘한 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논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문제에 대하여 신경 쓸 필요 없이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관심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저 자신에게 묻고 있고 또한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행사 중에 목사 위임식이나 장로 장립식, 권사 취임식, 목사 은퇴식 등에 참여하면 온통 사람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공적과 칭찬이 난무하면서도 타이틀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인간들을 자랑하고 드러내자는 취지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장례식 같은 곳에서도 십자가의 주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공로만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하신 자가 누구입니까? 지난번 강론에서 살펴본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는 복수를 호소하는 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피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벨의 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로써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말씀하시는 주님을 거역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구속의 은총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묻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피로써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그분을 거역한다는 것은 언약의 피를 짓밟는 행위이며(10:29),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말씀을 경멸하는 짓이며(6:5,6), 살아계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3:12).

앞에서도 누차 말씀드렸지만 히브리서 기록자는 당시의 성도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명령조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아무리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믿음이 주어지지 않은 자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고 권면한다고 해서 거역하고 안하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다19절의 말씀과 대조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의 기록에서 이스라엘이 듣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반역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록자는 분명 불순종과 반역으로 점철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자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더 이상 말씀하시지 말아 달라고 요청을 하는 그들의 마음의 강퍅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서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을 표현함으로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은 곧 우리의 죄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피로써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것에 대한 심판과 반대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설명함으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나라가 결코 흔들릴 수 없는 나라임을 선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라고 함으로 땅에서의 경고와 하늘로서 주어진 경고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땅에서 경고하신 자와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자가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에서의 경고는 구약의 시내 산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하늘로서의 경고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땅에서 경고하신 자나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는 다른 분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히브리서 1:1,2에서 이미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땅과 하늘에서 말씀하신 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내산에서 말씀하셨던 그것은 곧 십자가로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것의 본질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해 귀를 막았을 때 응분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불신앙을 인해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3:19, 4: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들에게 경고하실 때에도 사정이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론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제 더더욱 피할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뜻입니다.

레위 제도 및 그 제사가 불완전하고 임시적인데 반해 그리스도의 자기 몸 제사가 이룬 구속은 더욱 우월하고 완전하고 최종적이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율법 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에 대한 거부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은혜로부터 이탈된 자들에게 임할 결과는 얼마나 무서운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겁을 주거나 심판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런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26).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온 산이 크게 진동할 정도로 땅을 진동시켰습니다(19:18). 하나님께서 율법을 전달하실 때의 무서운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최후 심판을 예시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학개서 2:6에 의하면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유지를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즉 이 피조 세계 전체가 진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사건은 하늘이 진동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27)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늘이 진동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이었고 동시에 흔들리는 것들을 폐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들입니다. 즉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에 의한 제사 제도도 흔들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속의 은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곧 십자가에서 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28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에 성도에게는 이미 진동치 않는 나라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땅의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주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은혜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은혜로 받자라는 표현은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그런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은혜를 받자는 말의 본질적인 뜻은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구속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함이 있습니다. 감사함이 있는 자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범사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5:20, 3:17).

이는 단순히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예배, 기도, 전도, 헌금 이 모든 것들은 이 땅의 흔들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종교적 행위를 통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진동하는 것들을 가지고 진동하지 않는 분에 의해 주어질 그 나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종교적 행위의 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 전도, 헌금, 기도 등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신앙 성숙을 위해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거부하면서, 그것들은 종교적 행위이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또 모든 것이 죄악이라는 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정말 고인은 진동하는 이 땅의 나라는 날마다 버리고자 했고 오직 진동치 않는 나라만을 소망하고 살았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사람들이 평가하게 될 것 같습니까?

히브리서 기록자는 첨언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29)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진동하는 모든 것들을 능히 소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써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이 땅의 흔들리는 모든 것들은 결국 소멸될 것임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말씀하시기를 거부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섬기도록 은혜를 입은 존재입니다. 그 은혜를 내 마음대로 거부하거나 또 좌절할 권리도 우리에게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오늘도 이 흔들리는 세상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나라만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동치 않는 나라가 우리의 삶의 방법이요 목표임을 믿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