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6.히브리서 13:14-17 찬미의 제사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29

히브리서 56

찬미의 제사

히브리서 13:14-17


과거 우리는 오랫동안 영어를 배웠습니다. 중학교 3, 고등학교 3, 대학에서 4년을 배웁니다. 10년을 영어를 배웠는데도 외국인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교육부에서 반성이 있었습니다. 문법 위주로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영어 교육은 패턴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처음부터 대화위주로 영어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 그 자체를 습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쓰는 말인 한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에 말을 배울 때에 문법을 공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법은 나중에 중학교에나 가서 배우게 되지요. 살면서 언어 그 자체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어 문법을 다 알아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렇지만 문법에 맞지 않으면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고 언어 표현이 어색하게 됩니다. 말을 하면 그것이 문법을 지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언어 자체를 습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아서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법을 지켜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언어도단이듯이 어떤 규칙 혹은 율법을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표시를 내고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배워서 그것을 행하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을 좇아가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 생활만큼은 거꾸로 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자꾸 지켜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규칙, 율법 이런 것들을 지켜서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늘 힘이 드는 것입니다.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또한 죄인이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의 전부가 거의 목회자에게 맡겨진 듯한 느낌입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7절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누가 가장 좋아하는가 하면 목회자들입니다. 같은 말씀인데 누구는 굉장히 좋아하고 누구는 그냥 순종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말씀을 이미 자기 형편과 처지 직분에 따라서 보는 자기중심적인 시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 때문에 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자기 입장을 대변해주고 자기편을 들어주는 성경 구절들을 좋아합니다. 목회자들은 이 구절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를 잘 대접하고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라는 듯한 표현이 나오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조금만 주의 깊게 문맥과 함께 살펴보면 금방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에서 성경을 보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십자가의 주님을 말씀 안에서 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3:13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이란 한마디로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거룩한 땅으로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죽음과 저주의 땅이라고 표현하는 영문 밖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였습니다. 기존에 인간이 거룩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시고 사람들이 저주와 죽음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거룩으로 내세우셨다는 것은 인간이 알고 있는 거룩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어디가 거룩이고 어디가 비 거룩인가 하는 것이 세상의 것이 기준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룩과 비 거룩의 기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거룩과 비 거룩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막이 세워지는 것은 실제적으로 40장에서 완성됩니다. 그 사이에 모세가 장막을 하나 취하여 진과 완전히 분리되는 상당히 먼 거리에 세우고 이를 회막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33:7). 이 회막은 잠정적인 성소 구실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거기에서 말씀하실 때에 구름 기둥이 그 위에 내려 왔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회막을 세운 것은 백성들이 반역을 일삼는 죄악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거룩한 진영 내의 땅을 더럽힘으로써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진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행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 밖의 모든 영역이 거룩하지 못한 곳으로 간주되고 진을 떠나는 사람은 그 행동 자체로 불결해지는, 평상시의 상황이 이때에는 완전히 역전되고 있었습니다. 죄가 진영을 거룩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므로 진 밖에 거룩한 성소를 설치한 행위는 약속에 의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문 밖에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곳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성 안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든 사실들은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성문 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뜻하는 말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장차 올 것과 여기를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에 장차 올 것이 주님에 의해 거룩의 자리로 드러난다면 여기는 비 거룩의 자리입니다. 단순히 세상이라는 차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대치되는 모든 비 거룩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비 거룩, 저주와 죽음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은 악하다고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자리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존재가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원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거룩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자리는 세상에서는 천대받는 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영광중에 승천하셨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큽니다(참고 행 1:12). 즉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자는 또한 그의 영광의 승천에도 동참하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생명입니다(3:3).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함께 부활하며 또한 승천하여 보좌에 앉게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6:3이하, 2:6).

그러므로 성도는 단순히 세상을 떠나는 차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비 거룩이라는 곳에서 떠나는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새로운 거룩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세상을 버리고 세상과 등지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상에 살면서도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거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늘 그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이유는 세상에 살면서 이 땅의 것이 비 거룩임을 늘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 거룩에서 벗어나 오직 하늘에서 오신 분만 거룩하신 분이고 그 거룩에 합류된 성도인가를 확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늘 이러한 확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건짐 받은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주님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라는 표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드리는 제사는 어떤 제사입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성도가 드리는 제사는 어떤 인간이나 제도를 통해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양을 잡고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온전한 제사 때문에 우리는 찬미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13:12).

찬미의 제사란 어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찬미라고 하면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16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찬미의 제사란 선을 행하는 것이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찬송을 잘하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목회자를 대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목회자들이 자기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주는 말씀으로 알고 교인들에게 무조건 강조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뜻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15절에 보면 찬미의 제사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제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제사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를 싫어할지라도 주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 제도 하에서 드려지는 제사와는 달리 이 제사에는 양을 잡거나 어떤 규례대로 의식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먹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내부로부터 입술을 통해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제사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나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영문 밖의 주님을 좇아가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영문 밖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율법사가 와서 어느 계명이 큰가를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계명이 큰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똑 같은 계명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구약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 주셨습니다. 호세아 6:6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그것이 제사의 진정한 뜻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록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50:23)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정해진 제사의 규칙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형식을 통해 정확하게 율법의 규정대로 의식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 형식 그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하나님께 감사가 터져 나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온전히 드리신 제사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나오는 제사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제사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나오는 입술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입술의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무조건 목회자 잘 섬기고 대접하라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 성도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나 또한 그 말씀을 배우고 주님을 따르는 자나 동일하게 서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인도하고 있는 자에게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표현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목회자만을 표현한 것으로 좁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 서로 서로가 이러한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회계할 자인 것처럼 서로에게 말씀에 도전이 되고 또한 순종하는 모습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이고 또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1:27).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미의 제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문법을 배워서 문법에 끼워 맞추어 언어를 구사하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십자가의 삶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완벽한 제사를 드리신 주님이 살아 계시고 또한 우리가 그 제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이루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실 때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드리게 되는 그러한 성도의 모습인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