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1.히브리서 12:18-24 시내 산과 시온 산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16

히브리서 51

시내 산과 시온 산

히브리서 12:18-24


어린 아이들을 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낍니다. 2-3살 정도만 되어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것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본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두려움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있으며, 일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적인 두려움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성적인 두려움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막연한 것에 불과합니다. 죄인으로서 가진 본성이기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누구든 하나님을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인가 하는 것에는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본문 말씀 15,16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었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본성적으로 두려움이 있는데 왜 하나님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두려움만으로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어떠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함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함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루신 화평과 거룩을 좇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을 좇는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그 두려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본 서신 전체에서 제시하고 있는 옛것과 새것 사이의 대조를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곳곳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도 역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하나님의 은혜의 날에 뚜렷한 빛을 받은 이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십자가를 인정하거나 혹은 무시하는 것과 관련하여 훨씬 더 엄숙한 결과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천사들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에 불순종할 때에도 당연히 심판을 받았는데, 하물며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된(1:1-3, 2:2-3) 구원을 우리가 망령되이 생각한다면 어떻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가나안 땅이라는 안식보다 더 찬란한 하늘나라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란 당연한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3:16-4:1,11).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언약의 피를 발아래 짓밟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다시 한 번 이러한 현격한 차이를 논하면서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며 중요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강론을 시작하면서 초두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히브리서 기록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심판에 대한 겁을 주려고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오직 그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시내산과 시온 산의 의미를 대조하면서 복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아니라는 진술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곳에 갔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 흑운과 흑암, 폭풍,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직접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너무 두려워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이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할 정도였습니다. 출애굽기 20:19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하나님의 임재가 산 중에 나타나 있는 동안에는 산에 접근하거나 산과 접촉해서는 안되는 명령 때문에 그들의 두려움은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했었습니다. 아무도 그 거룩한 땅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그곳을 더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만은 접근하여 그 산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보이는 바가 이렇게 무섭기로, 즉 신적 권능과 위엄의 현현이 그처럼 두렵게 느껴졌었기에 모세는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말했습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21). 하나님의 율법의 산인 시내 산에서의 공포는 백성들의 죄악성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구약의 시내 산에서 율법이 내려질 때의 모습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새삼스럽게 시내 산의 상황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상황은 여러 가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있는 그런 때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함으로 인하여 수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사회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낙심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믿음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이 피곤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도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구약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던 시내 산의 상황을 기록하고 그것과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의가 이루어진 복음의 진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22-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던 산은 바로 시내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작렬하는 불꽃들, 빽빽한 구름들과 어두움, 폭풍과 지진들을 통하여 나타나셨는데 감히 어느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체적 현상 때문에 발생하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은 그 곳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온전히 덮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이 그 지경을 넘어서거나 산을 접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 된 인간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짐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택한 종 모세마저도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새 언약 아래에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산으로 상징된 시온산은 사무엘하 5:6-9에 의하면 본래 여부스 족속의 요새가 되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그곳을 점령하여 왕에 오른 지 7년째 되던 해에 왕의 거처로 삼게 된 지역입니다. 시온산은 소위 다윗의 도성으로도 불려지게 되었으며(왕상 8:1, 대하 5:2 ),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면서부터 시온산은 다윗 왕국의 신앙적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장소로 간주되었습니다(삼하 6:10-12).

후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시온의 언덕 북쪽의 모리아 산에 성전을 지어놓고 그곳으로 언약궤를 옮겼을 때, 시온이란 이름은 성전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8:18, 18:7, 24:23, 3:17, 4:7). 그리고 나중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왕하 19:21).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시온이란 용어를 이스라엘 종교와 삶의 구심점이며, 열 두 지파들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신앙의 중심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그들과 만나는 지상적 장소가 시온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온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성전 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서 거기서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시온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보루였고, 최후의 피난처였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그곳을 향하여 부르짖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미 이러한 시온 산에 다다랐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부활하신 후에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님으로 천상의 보좌 위에 등극하시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의 도성,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그토록 소망으로 삼았던 곳 이곳이 시온 산입니다. 성도가 다다른 곳이 시온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천사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시온 산의 보좌 위에 좌정하시고 계신 재판장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온 것은 심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길을 달려온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모하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시작 할 때에 등장된 시내산은 모세 율법 수여와 아론의 제사 제도의 제정을 상징합니다. 또한 불충성과 불평불만으로 인한 정죄의 구름 아래 광야에서 멸망했던 그 세대의 방랑 생활과 가나안 땅의 진입으로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시온 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제사장 확립과 십자가로 말미암은 새 언약의 모든 약속이 성취됨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방랑의 끝이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의 지성소인 시온 산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10:19 이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신 완전한 제사, 완벽한 율법 준수로 말미암아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존전에 용납이 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평과 거룩을 좇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드려졌던 동물의 피를 흘려 드렸던 제사는 죄를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10:4,11).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레위 제사장들이 드린 짐승의 피와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와도 다릅니다. 아벨의 피는 최초로 인간이 흘린 피였습니다. 미움에 의해 유발된 무서운 형제 살인의 피는 죄의 부패성과 극악성, 또는 세상의 실제적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유발된 십자가의 피는 자기 백성들을 대속하게 되는 엄청난 은혜의 도가니가 됩니다.

24절에서 아벨의 피가 무언가를 말한다는 개념은 창세기 4:10을 근거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인간의 죄악성에 의해 흘려진 아벨의 피는 공의와 복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저주가 선포되었던 것입니다(4:11).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더 나은 약속의 피이기에 가인과 같은 죄인인 우리들을 향해 은혜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벨의 살해로 인해 선포된 복수보다 나은 하늘나라의 생명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구속, 죄에 대한 용서를 온전히 성취하였습니다. 시내 산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하나님 존전에도 나아갈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어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상태에 있었는데 십자가의 피가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로 바꾸었습니다. 거룩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거룩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분명히 선언하고 누차 강조한 바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라고 했고, 히브리서 10:19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도 요한일서 1:7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특히 에베소서 2:13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고 가까워진 것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 함께 성도된 자들 역시 가까워졌다고 바울 사도는 보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있게 되는 것은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같은 복음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성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나오고 나오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성교회라고 하는 한 울타리 안에서 복음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함께 복음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는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더욱 주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발견하고 십자가만 좇아가는 일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함께 십자가를 바라보고 좇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인간의 죄악상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까지 친목으로 안주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임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모였습니다. 모여서 잡담 정도로 끝내지 말고 일주일 동안 살았던 얘기만으로 끝내지 말고 그것을 통해 십자가를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시내 산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담과 생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온 산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절기, 규칙을 통해 무엇인가 해야 하고 거기에 우리의 행위를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시내산의 상황입니다. 그 상황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유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교회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만족하는 교회요 성도인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