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50.히브리서 12:14-17 화평과 거룩을 좇는 자

불편한 진리 2014. 9. 16. 16:13

히브리서 50

화평과 거룩을 좇는 자

히브리서 12:14-17


기독교인이라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라든지 아니면 겸손한 투로 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못되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라는 말들입니다. 심지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먼저 물어봅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고 해서 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스스로 믿음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아무리 믿음 있는 척 할지라도 자신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가장 먼저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종일관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계속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었습니다. 평소에는 몰랐습니다. 자신들은 언제나 언약의 하나님을 좇아가는 듯 했었습니다. 믿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동경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향해 하루라도 바삐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오고 어려움이 주어지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동경하고 희망하기보다 오히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 상태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시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곤경에 빠뜨려 난처함에 빠져서 어쩔 수 없어 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훈련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하여 시험을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숙한 성도로 만들기 위하여 훈련을 시키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훈련은 실패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수십만을 훈련시켜서 겨우 두 사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훈련이 실패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그런 고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 몰아 세웠던 것은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훈련시킨다고 애굽을 좋아하는 인간이 가나안 땅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 넣었을 때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를 느끼고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온전한 인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을 좇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오자 하나님의 원수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죄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고 그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징계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잘 드러난 구절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8:2-6).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우리가 노력하거나 강한 훈련을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 주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자가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초신자 위에 따로 존재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끌 때에 우리는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입니까?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꼬박꼬박 바치며, 목사님 말씀에 순종 잘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나타난 일들을 가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단하며 또한 그러한 성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 신앙 생활의 전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록자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징계란, 하나님께서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 맺어지는 열매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의의 평강한 열매인 것입니다. 피곤과 낙심함에 안주해 있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기에 히브리서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이란 결코 죽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의의 평강한 열매를 주님께서 맺으실 것입니다. 애초부터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라면 주님이 시작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반드시 자기 것, 자기 열매를 찾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주님은 결코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편안한 삶에 또한 자기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면서 인간들의 종교성을 지적하고 죄인됨을 지적하자 인간들은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표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단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이었고 그 모습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로마의 사형 형틀인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의도했던 그런 개죽음을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십자가에 잘 죽였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님을 통해 계속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들을 홀로 그냥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결단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계속 이끌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이끌되 어디로 이끌고 계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징계를 받도록 끌고 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편한 쪽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누르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못되더라도 나는 잘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인간들이 원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렇게 죄인들이 원하는 복을 주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는 것입니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열매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열매도 아니고 이 땅에서 누리는 세상의 열매도 아닙니다. 의의 거룩한 열매입니다. 의의 거룩한 열매는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 주님 안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제 화평과 거룩을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아니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화평과 거룩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7:2에서 말씀했던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자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존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에 있는 이 땅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평화의 관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2:14)고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시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거룩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구별이 바로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가야 하는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신 계획이었습니다. 단지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의 거룩성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에로 부름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거룩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화평이나 거룩과는 관계가 없는 존재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본래 화평, 거룩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려주셨기에 하나님의 평화와 거룩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는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이렇게 노력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권유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의 말씀들을 대부분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의 행위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지적하신 말씀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위선과 외식적인 경건에 대해 철저히 공박하셨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자기 과시, 겉치레로 하는 계산된 행동,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자 하는 구제 이런 것들에서 유대인들의 비거룩성이 낱낱이 공개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경건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대한의 방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죄인됨과 비거룩성을 폭로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힘과 종교성을 가지고 거룩함을 드러내고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애초부터 거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히브리서 기록자는 히브리서 11:6에서 이미 이렇게 선언한 바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과 거룩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평과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에 의해 주어진 화평과 거룩만이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에서도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6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11:6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데 화평함과 거룩이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만들어낸 화평함과 거룩함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씀하면서 부정적인 면으로 이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15,16).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쓰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18,19에 보면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그렇게 염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 존재인지 잘 아신다는 뜻입니다. 아주 연약한 상태에 있으며 늘 하나님을 원수로 삼을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주님은 잘 아십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은 자, 즉 화평함과 거룩함을 입은 자는 당연히 화평과 거룩을 좇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가 다른 것을 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 붙잡혀 있기 때문에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좇아 사는 것은 당연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에서는 한 순간의 육체적 식욕을 만족시키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무시하였습니다.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좇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의 명분을 무시하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날 우리가 하찮은 세상의 것을 하나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삶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 화평과 거룩함을 좇아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더욱 그리스도만 좇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